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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 칼럼] 탈진실 시대와 대통령 선거

등록 2021-09-03 04:59수정 2021-09-03 19:10

홍세화|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최근 방영된 한국방송(KBS) 시사기획 <창>의 ‘회장님의 슬기로운 감빵생활…컴백홈 비밀은’ 편의 마지막에 문재인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발언이 나온다. “재벌이나 대기업의 총수나 임원쯤 되면 국가 경제에 기여해온 공로라든지 국가 경제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 때문에 법원 형량을 정할 때부터 엄청난 고려를 받고 있고 국민이 볼 때는 특혜를 받고 있거든요. 형량에서 특혜를 받고 있는데 가석방에서도 또 특혜를 받는다면 그것은 저는 경제정의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2015년, 국회의원 문재인)

이재용씨가 결국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의 2년6개월 형량은 정경심씨의 4년형에 견줘도 무척 가벼워 보였다. 슬라보이 지제크는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를 탈진실 시대의 현상의 하나로 지적한 바 있는데, 그 전형적인 예를 문 대통령이 보여준 셈이다. 청와대에서는 “국익을 위해”라는 말이 나왔다. 경제정의보다 국익이 우선한다는 논리는 본디 수구세력이 애용해온 것이었다. 지난해 정년을 앞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복직 요청에는 법 규정을 내세워 끝내 외면했던 문 정권이 이재용씨를 위해서는 법 규정을 수정하면서 가석방을 관철시켰다. 이석기 전 의원은 이번에도 가석방에서 제외되었다. 그가 분단체제 아래 과도한 형량의 희생자라는 것은 인권변호사 출신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수구세력은 북한이라는 공포를 앞세워 반대세력에 대한 마녀사냥을 해왔다. 통제될 듯했던 코로나19 팬데믹이 델타 변이로 확진자가 늘어나자 김부겸 총리는 수구세력과 보조를 맞추어 7·3 노동자대회 때문에 델타 변이가 유행한 양 민주노총을 겨냥했고 경찰은 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집행했다. 대회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방역지침을 지켰고 관련 확진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한때 민주화 운동에 나섰던 인물도 권력을 잡으면 반(反)공화주의적 퇴행에 이끌리는 것인가. 알베르 카뮈에 의하면,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라는 명제는 공화국의 기틀이 되는 원칙이다. 오늘 한국에서는 국익의 이름으로 경제정의를 배반하고, 질서의 이름으로 사회정의를 배반하는 반공화주의적 정권이 자칭 타칭 진보정권, 촛불정권이다. 탈진실 시대를 웅변해주는 한국 정치의 단면이라 하겠다.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현상으로는 서로 다투지만 본질에서는 다투지 않는다. 현상이 본질을 감추고 있는 점에 대해 한겨레신문도 제대로 짚지 못한다는 게 평소 내 생각이다. 두 당은 둘 사이의 권력쟁취 게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서는 열심히 다툰다. 공수처법안 앞에서, 그리고 최근 언론중재법안 앞에서 두 당은 치열하게 다투었다. 잠시 돌아보자. 법을 재개정하면서 밀어붙였던 공수처법보다 더불어민주당이 더 열성을 보인 법안이 있는가? 그런데 그 공수처가 애당초 기대했던 바와 같은가? 이런 현상만 뒤쫓으면 본질을 놓칠 수 있는 것이다. 두 당은 민생 현안 앞에서는 치열하게 다투지 않는다. 설왕설래하거나 더불어민주당 쪽에서 간혹 립서비스가 나올 뿐이다. “안전 때문에 눈물짓는 국민이 단 한 명도 없게 만들겠습니다”(2017년 4월13일, 문재인)라는 대선 공약에 수많은 사람이 감동했는데, 두 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 앞에서 별로 다투지 않았고 법은 누더기가 되었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에 관해 서사 없는 숫자로 들어야 한다. 두 당은 또 부동산 양극화가 극도에 달하면서 집값이 치솟자 집 부자들을 위한 감세에 0.1%의 차이로 함께 나섰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질식시킨 위성정당을 만드는 데에도 두 당은 똑같았는데, 부동산 투기에 있어서도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는 게 드러났다. 반면에, 노동권 입법, 의료 공공성 확충, 조세 개혁, 교육 개혁 등 중대한 민생 사안은 그들의 주요 관심 대상이 아니고 다툼거리가 되지 않는다. 법안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성립되어도 회기가 만료되면서 자동 폐기되기 일쑤다. 당장 10만 시민이 청원한 차별금지법이 또 그럴 위험에 처해 있다.

실상 두 당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점을 김종인씨의 행보만큼 적실하게 증언해주는 게 없을 것이다. 그는 4년을 사이에 두고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미래통합당(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냈다. 영국처럼 여야 의원들이 마주 보는 국회 회의장 구조라면 이쪽에 앉았던 당대표가 갑자기 반대쪽에 앉게 되는 형국이다. 이는 분단체제 아래 탈진실 시대 이전부터 한국 정치를 규정한 골격구조인데, 두 당이 함께 위성정당을 만들었던 배경과 속내를 설명해준다. 영국 의회로 치자면, 한쪽에 나란히 앉아 있어야 할 두 당이 지금까지처럼 계속 마주 보면서 의회를 장악하려면 영국노동당과 같은 진보좌파정당의 진입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을 교대로 차지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정립되는 데 있어서 두 당은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많은 후보자들이 나섰다. <한겨레>를 비롯하여 언론은 그들이 경쟁 상대에 대한 네거티브 선거전을 펼친다고 비난한다. 공약을 제시하고 토론하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공약(公約)은 집권할 때까지만 유효할 뿐, 집권한 뒤에는 그 대부분이 공약(空約)이 된다는 것을 문재인 정권이 충분히 보여주었다. 4년여 전에 우리가 들었던 촛불은 지금 무엇으로 남았나? 당시에는 개헌 논의도 활발했고 시민의회 등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표출되었다. 그러나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나중에”도 계속 나중에로 남았다. 그런데 정치인이 손바닥 뒤집듯 자기 말을 뒤집어도, 공약이 공약(空約)이 되어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것 또한 탈진실 시대의 현상 중 하나다. 정치인에 대한 호오 감정이 옳고 그름의 판단을 압도하는 것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은 수구기득권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득권 세력을 형성케 하고 굳게 하는 것이 콘크리트 지지층이다. 대선 후보자들은 네거티브로 달려가게 돼 있다. 탈진실 시대에는 나의 정책 공약을 홍보하기보다 상대방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는 쪽이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불평등의 극대화, 심각한 교육 현실이라는 질곡 아래, 청년들이 미래를 설계하기 어려운 ‘헬조선’에서 합계출생률이 0.8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중첩된 위기 상황에 비해 한국의 정치권은 그 지형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는 또 하나의 위기가 있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엄중한 시기에 대선을 앞두고 변혁성과 급진성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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