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농민총궐기대회\'를 마친 농민들이 행진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전국 프리즘] 안관옥ㅣ전국팀 선임기자
풍년이 들어도 농민들은 웃지 못한다. 쌀값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진짜 화가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울분을 터트린다. 하지만 논을 갈아엎고 돌을 던진다고 해결할 수 없음을 안다. 이번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인 ‘파업’을 해보기로 한다. 사발통문을 돌려 용의주도하게 식량과 전략을 준비한다. 어느 봄날 더는 씨앗을 뿌리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도시에서 영화 <설국열차>에 나왔던 단백질바 값이 뛰든 말든 절대 돌아보지 않기로 한다. 농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 설립했다는 농협에서도 일제히 탈퇴한다. 정당과 후보한테 농민을 ‘천하지대본’이 아니라 ‘천하지대봉’으로 여기지 않았는지 따진다. 시장의 혼란을 막는다며 농산물을 죄다 수입하고 파업 지도부를 모두 끌어가면 농지와 주택도 주저 없이 반납한다. 그리고 ‘농민 없이 식량 없고, 미래 없다’며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간다.
인도 농민들은 한해 동안 뉴델리에서 이런 구호를 걸고 노숙투쟁을 벌여 국가가 관리하던 농산물값을 시장에 맡기려는 법률을 철회시켰다.
다행히 이런 상상이 현실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이들이 나타났다. 철학자 김용옥 선생과 농업학자 박진도 충남대 명예교수가 그들이다. 이들은 지난달부터 가을걷이가 끝난 전국 들판에서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 개벽 대행진’을 펼쳐왔다.
왜 하필 ‘개벽’인가. 한 세기 이전처럼 하늘이 뒤집히고 대지가 엎어지는 것을 바라는가. 이들은 농업의 현실이 정책 한두 가지로 고칠 수 없는 지경이라고 본다. 천지개벽 수준으로 새 틀을 짜자고 외친다. 김 선생은 인간과 자연은 하나고, 자연은 곧 농업이라고 했다. 언제부턴가 인간은 자연이, 농업이 근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단다. 박 교수는 “농민이 행복하지 않으면 국민이 행복할 수 없다”며 “더 늦기 전에 농촌을 국민총행복을 위한 일터, 삶터, 쉼터로서 제 역할을 하도록 하자”고 호소한다. 성장과 개발의 관점에서 농촌을 바라보면 죽었다 깨어나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이들이 말하는 삼강오략(三綱五略)도 신선하다. 기후 위기, 먹을거리 위기, 지역 위기에 대응하는 농촌을 만들기 위해서는 △농민의 행복권 보장 △공익적 직접지불 확대 △먹을거리 기본법 제정 △농촌 주민 수당 지급 △농촌 주민자치 실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여태껏 정치권과 지식인은 농촌 현실에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4년 전 19대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이 대표적 사례였다. 5차례 600분의 토론에서 한 후보만 3~4초 스치듯 언급했을 뿐이다. 이를 반성한 백낙청·도법·성염·박맹수 등 50여명이 ‘개벽’ 대행진의 발기인으로 나섰고, 각계각층 1000여명이 추진위원으로 동참했다. 멍석을 깔아놓았으니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 후보들도 개벽의 진로를 두고 끝장토론 한번 붙어보시기를 권한다.
해남 땅끝에서 출발한 행렬은 전북 김제와 익산, 충북 옥천과 괴산, 경기 수원과 파주, 경북 영천을 지나 안동에 닿았다. 마을마다 열린 행진과 민회 열기는 자못 뜨겁다. 농민들은 외지인이 절반 넘게 차지한 농지 소유를 비롯해 인구 소멸의 신호탄인 학교 폐교, 방방곡곡을 병들게 하는 산업폐기물 따위 문제들을 봇물 터트리듯 쏟아냈다. 시인 정지용의 고향인 옥천에선 ‘향수’를 다 함께 노래하며 민족의 정서가 녹아든 정겨운 농촌상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다음달에는 경남 창원과 진주, 충남 아산과 홍성, 강원 평창과 원주로 향한다. 전국 팔도를 순례한 행렬은 내년 1월19일 서울로 가서 종합행진을 펼친다. 성장주의의 그늘을 찾아가고 국민 행복의 희망을 전파하는 과정은 유튜브 ‘지역재단’과 ‘도올티브이(TV)’로 전해지고 있다. 영상에 담겼던 농민 한분의 말씀이 아릿하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농사지어온 것처럼 나도 농사짓고, 자식도 농사짓고 싶다. 올해도 농사짓고, 내년도 농사짓고 싶다. 이게 그토록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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