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김소민 | 자유기고가
“(돼지가 죽는 과정을) 우리는 잘 모른다. 모르는 편이 먹기에 편하니까. 물고기가 죽어서 식탁에 오르는 과정은 동네 횟집에만 가도 볼 수 있다. 큰 횟집에선 참치 해체쇼를 하기도 한다.” 문미소씨가 쓴 ‘물고기는 왜’란 글을 읽고 ‘진짜 그렇네’ 했다. 나는 강아지 몽덕이를 키우다 육고기를 먹지 않게 됐는데, 해산물은 걸신들린 것처럼 흡입한다. 닭, 돼지, 소의 고통은 어느 정도 상상이 되는데 횟집에선 내가 먹을 통통한 놈을 골라도 아무렇지 않다. 친구가 그랬다. “너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해산물주의자야.”
아마도 인간이 보기에 물고기보다 돼지가 인간과 더 닮아서인 거 같다. ‘완벽한 타자’를 향한 폭력은 오락이 된다. 타자의 고통은 상상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죄책감 없이 착취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끼리도 어떻게 해서든 차이를 부풀려 타자로 만드나 보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보지 말걸 그랬다. 내 사랑, 문어숙회 어쩔 건가? 문어 닮은 낙지, 연포탕은 어쩔 건가? 딱 한마리 문어만 보여주는 이 다큐 때문에 괴롭다. 슬럼프에 빠진 감독 크레이그 포스터는 고향인 남아프리카 바닷속으로 홀로 들어간다. 온몸에 조개를 두른 이상한 ‘물체’를 만난다. 위장한 암컷 왜문어다. 그는 ‘그’를 매일 만나러 간다. 이 문어는 전략가다. 파자마 상어에게 쫓길 때 잽싸게 수면 위 바위로 올라갔다. 오래 머물 수 없다. 물로 다시 들어간 문어는 상어의 등 위에 올라탔다. 상어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이 문어는 호기심도 많다. 팔을 뻗어 물고기 떼에게 장난을 걸고 세상을 탐색한다.
나는 문어에게 감정이입하고 말았다. 그가 상어에게 쫓길 때마다 그를 돕지 않는 인간 감독이 미웠다. 그런데 문어가 ‘지적인 존재’라서 공감한다면, 그래서 더 살 가치가 있게 느껴진다면, 돼지 죽이는 꼴은 못 보지만 접시 위에서 숨 쉬는 생선 머리를 보고 감탄하는 태도와 뭐가 다른가? 수나우라 테일러는 책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왜 수어를 할 줄 아는 침팬지 ‘부이’를 영장류 연구소에서 풀어달라는 여론은 들끓었지만, 그렇지 못한 침팬지들은 관심 밖에 방치되었나? 수나우라 테일러는 장애인과 동물 차별의 논리는 같다고 주장한다. 이성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이를 담은 특정한 몸이 있다고 상정한 뒤 줄 세우기 하는 방식이다. 성별, 인종에 따른 차별도 이 줄 세우기를 따른다. 애초에 인간이 상상도 못 할 수많은 재능과 미덕이 반짝이는 세상에서 이성이 특별 지위를 누릴 이유는 없다.
왜문어는 환경에 따라 피부 색깔과 질감을 바꾼다. 괴상하다. 그가 인간에게 다가와 빨판으로 손을 잡았을 때 감독은 “경계가 사라지고 문어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관계는 기쁨이자 고통을 전달하는 신경이다. 문어가 파자마 상어에게 한쪽 팔을 뜯겼을 때, 감독은 “심리적으로 내 팔이 잘린 거 같았다”. 감독은 문어를 통해 다시마숲 속 얽히고설킨 관계를 파악한다. 알을 품은 암컷 문어는 동굴에서 꼼짝 않는다. 굶어 죽어간다. 알이 부화해 바다로 흩어지는 날, 문어는 겨우 굴 밖으로 기어 나오고 물고기들에게 뜯어 먹힌다. 나는 문어가 죽을 때 울었다. 감독은 “그의 연약함으로 나의 연약함을 절감했다”고 했다. 태어나, 살려고 몸부림치다 죽는 것, 그 비장한 사이클을 문어도 나도 돈다. 우리는 그렇게 하찮으며, 위대한 관계의 일부분이다. 문어와 나는 닮았다.
문어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으면, 숙회는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겠지만 문어의 아름다움은 알지 못할 거다. 그런데, 아, 자꾸 먹고 싶다.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를 못 보겠다. 생선 먹는 게 괴로워질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