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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만점자의 불편한 인터뷰

등록 2021-12-14 18:01수정 2021-12-15 15:53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황춘화 | 사회정책팀장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치렀다. ‘2002학년도 수능’의 의미를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몇자 덧붙이면, 전년보다 언어영역과 수리영역 1등급 커트라인이 각각 18점(120점 만점), 14점(80점 만점) 대폭락했다. 1994년 수능 제도가 도입된 이후 이때 처음으로 ‘불수능’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당시 2457명의 수험생이 시험 도중 고사장을 뛰쳐나갔다. 만점자는 없었다. 대신 성적을 비관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수험생이 수십명에 달했다. 당시 수능 결과는 내게도 참담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스카이(SKY)가 아닌 한 대학교에 합격했다. 잠시 재수를 생각했으나 곧 접었다. ‘대학이 뭐가 중요하냐, 전공이 중요하지.’

전공보다 학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뒤늦게 깨달았다. 출입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으레 출신 학교를 물었다. 전공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여러차례 반복될수록 출신 대학은 썩 밝히고 싶지 않은 콤플렉스가 됐다. 입사 첫해에 후회했다. ‘그냥 재수할걸.’

지난 9일 2022학년도 수능 채점 결과가 공개됐다. ‘문과·이과 통합’으로 처음 치러진 수능이었다. 국어 수학의 표준점수가 전년보다 올랐고(시험이 어려워 평균이 내려가면 표준점수가 올라간다), 절대평가인 영어 1등급의 비율은 반토막이 났다. 역대급 불수능이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럼에도 만점자가 나왔다. 강태중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은 “수능에서 만점을 받을 잠재력을 가진 학생은 적어도 수천명에 이르지만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만점의 행운을 잡은 수험생은 1명이다”라며 “만점을 받은 학생에게만 주목하지 말고 잠재력을 가진 수천명 이상의 학생들 그리고 전체적인 수험생들을 봐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단 1명의 만점자에게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10일 여러 매체가 만점자를 인터뷰했다. 만점자 김씨는 특목고를 졸업하고 2021학년도에 고려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반수를 결심하고 대형 기숙학원에 들어가 학원 수업을 충실히 들으며 기출문제 위주로 공부했다고 한다. 김씨는 “정부 부처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며 서울대 경영학과에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반수, 기숙학원, 서울대… 뒷맛이 썼다. 그의 인터뷰는 서울대를 꼭짓점으로 하는 대학 서열화와 학벌 사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뿌리 깊은 학벌 사회에서 소위 명문대는 부와 계급을 대물림하는 가장 합법적이고 강력한 수단이다. 매년 10만명이 넘는 졸업생들이 계급의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해 재수를 한다. 재수의 결과는 나쁘지 않다. 의대 정시모집 합격자의 80%가 재수생으로 채워질 때도 있다. 졸업생에게 밀린 재학생들은 다시 엔(n)수의 길로 들어선다. 물론 경제적 뒷받침이 되는 그들만의 이야기다.

교육부가 2022학년도 대입개편안 마련을 위해 공론화 과정을 밟고 있던 2018년. 취재를 위해 만난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학부모는 수능 정시 확대를 주장하며 이런 말을 했다. “강남에서는요, 서울대를 가는 건 아이의 능력이라고 해요. 하지만 아이가 연·고대도 못 가면 그건 부모가 무능력한 거라고 해요.” 강남에서 수능 정시모집은 아이를 명문대에 보낼 수 있는 가장 쉬운 입시제도였다. 그리고 교육부는 2018년 20% 남짓이던 서울 주요 대학의 정시전형 비율을 40%까지 늘려놨다.

직장생활 10여년 학벌 콤플렉스는 무뎌질 만도 하건만, 잊을 만하면 송곳처럼 튀어올라 상처를 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20년 전 결정을 후회하곤 한다. 20년째 이러고 있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수능 만점자의 선택을 마냥 비판할 수 있을까. 수능 결과가 나온 날 언론이 주목해야 했던 건 수능 만점자의 반수 성공담이 아니라, 갈수록 퇴행해가는 대한민국의 입시제도와 무너진 교육의 현주소 아니었을까. 언론이 ‘전체 수험생들을 생각했다’면 말이다.

sflow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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