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프리즘] 이정연 | 젠더팀장
<한겨레>는 1월부터 대선 기획 ‘나의 선거 나의 공약’을 내보냈다. 내가 속한 젠더팀은 기획의 4번째 순서로 ‘지금 당장, 성평등’을 맡아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써 이번주 <한겨레>에 실릴 예정이다. 기자들은 주제 분야에 관해 나의 경험을 나누고, 나의 공약을 전달하고 싶은 20명 안팎의 유권자들을 인터뷰했다. 처음 이런 기획 구상을 듣고는 막막함이 앞섰다. 이번 대선 정국에서 성평등 분야는 백래시(사회 변화에 반발하는 움직임)가 극심한 상황이다. 성평등 가치를 왜곡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이용하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거칠었다.
막막함과 걱정은 터져 나오는 이야기에 씻겨 나갔다. 성평등 분야의 인터뷰에 응한 20명 유권자 가운데 5명을 맡았다. 이들은 임신중지 경험, 노동 현장의 성차별, 20대 여성이 겪는 정신건강의 위기 등 각자가 일상에서 겪은 이야기를 <한겨레>에 나누어 주었다.
말 그대로 터져 나왔다. 질문지를 준비했고 어느 정도의 인터뷰 시간을 예상해 두었지만, 준비와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이번 대선에서 느끼는 공통의 감정은 ‘분노’와 ‘무기력함’이었다. 각자 자리 잡은 삶의 현장에서 겪는 성차별과 여성 배제의 경험이 이토록 생생한데, 그것은 없는 일인 양 치러지는 대선 레이스를 여성과 성소수자 유권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5명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을 던지는 동안 수없이 많은 공감의 순간이 있었다. 성평등한 사회에 살고 싶다는 게, 그런 의견을 표현하는 게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괴롭힘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젠더 이슈를 다루는 기자, 특히 여성 기자들도 같은 현실 속에 던져져 언어폭력이나 온라인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인터뷰하며 때로는 한숨을 쉬고 때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서로를 위로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고맙다.” 5명의 인터뷰 참가자들은 그들의 경험을 듣고, 이 사회에 전달하고자 할 뿐인 한 명의 기자에게 잊지 않고 이 말을 건넸다. 고마울 일이 아닌데, 고맙다고 했다. “나보다 심한 일을 겪은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런데 성평등한 나라가 되려면 심하든 심하지 않든 내가 겪은 일이 부당하다, 성차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이제까지 입을 열면 안 되는 거 같은 분위기가 있었는데, 누군가 나에게 물어봐 주니 내가 겪은 일이 피해가 심하든 심하지 않든, 이 세상에 향해 할 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5명의 인터뷰 참가자 중 한 명은 인터뷰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나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인터뷰에 앞서 막막함이 앞섰지만, 터져 나오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됐다. 성평등을, 성차별 현실을 누가 그렇게 쉽게 꺼내놓겠어? 이런 걱정은 넣어둘 일이다. 유권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듣자. 대선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 캠프들에 하는 제안이다. 우리가, 내가 당신, 유권자에게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있다는 건 화려하고 장황한 연설보다 어떤 자세를 보이느냐로 가늠할 수 있다.
각 선거 캠프가 절박한 마음 자세로 대선 레이스의 종반을 달리고 있다. 그런데 유독 성평등 공약을 통한 표심 공략엔 절박해 보이지 않는 캠프가 있다. <한겨레>는 성평등 공약에 대해 할 말 있는 20명의 유권자의 목소리를 모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에게 지난달 19일 공약질의서를 보냈다. 한 캠프는 아직(6일 오후) 답을 해오지 않고 있다.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나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 공약 등의 공식화는 신속했는데, 그 밖에 성평등과 관련한 유권자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있다. 할 말이 없어서인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인지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유권자의 질문에 제때 답하지 않은, 그 자세가 문제다. 터져 나오는 이야기는 곧 터져 나오는 표심이 될 터다. 절박하다고 보기엔 그 후보, 그 캠프 참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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