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머우 감독이 1980~90년대에 만든 <붉은 수수밭> <홍등> <인생>이나 첸카이거 감독의 1993년 작 <패왕별희>는 한국 관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중국 영화들이다. 중국 ‘5세대 감독’으로 불리는 이들은 문화대혁명의 폐허 위에서 등장했다. 문혁의 고통을 직접 겪은 이들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희생되고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꿋꿋한 생명력으로 버티며 진심을 지키는 중국 민중의 모습을 그려냈다. 1992년 한-중 수교 직후 중국의 ‘첫인상’은 이러했다.
장이머우 감독은 2008년과 2022년 여름과 겨울 베이징올림픽의 개막식을 모두 연출했다. 올해 개막식에는 한복을 입은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성화 최종주자로 위구르인 선수를 내세웠다. 국제사회의 신장 위구르인들에 대한 탄압 비판에 정면으로 맞선 연출로 중국 국내에서는 환호를, 국제적으로는 논란을 일으켰다.
지금 중국 극장가에선 장이머우의 감독이 딸 장모와 함께 만든 <저격수>와 첸카이거 감독이 공동 감독한 <장진호의 수문교>가 맞붙고 있다. 모두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애국주의 선전 영화’다. <저격수>는 한국전쟁 후반기에 미군을 상대로 중국군의 한 부대가 벌인 유격전을 그렸다. <장진호의 수문교>는 지난해 중국공산당 100주년 기념 영화였던 <장진호>의 속편이다. 이들 영화는 한반도를 배경으로 하지만 남북한 군인이나 주민은 한명도 보이지 않는, 철저히 미-중의 대결로 한국전쟁을 그린다. 미군은 압도적인 무기를 든 오만한 악당으로, 중국군은 언 감자 한 알로 하루를 버티면서도 강인한 의지로 열세를 극복하는 영웅으로 묘사된다. “미국놈(美国鬼子) 몇명을 죽이면 영웅으로 쳐주나요?”라는 대사로 압축되는 세계관이다. <장진호>의 해외 상영은 극히 미미하지만, 세계 최대인 중국 내수시장만으로 지난해 전세계 영화 가운데 수익 2위에 올랐다.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뒤 중국의 노선·이념·제도·문화가 서구보다 우월하다는 자신감과 배외적 애국주의를 강조하면서, 중국과 외부 세계 사이의 장벽이 너무 높아졌다. 현실주의 강경 외교를 주장해온 옌쉐퉁 칭화대 교수조차 최근 강연에서 “중국의 청년 세대가 중국만이 정의롭고, 다른 나라 특히 서구 국가들은 사악하다고 여기는 이분법으로 세계를 보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중국 역사의 복잡함과 세계의 다양성을 이해하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림픽 개막식의 거대한 스크린에 비친 시 주석이 위압적으로 관객들을 내려다보는 ‘극장 정치’가 보여주는 것처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애국주의를 불러낸 시진핑 주석이 애국주의의 호랑이 등 위에서 내려오기는 어렵다. 그 ‘극장 국가’에서 장이모와 첸카이거는 이제 약자가 아닌 권력의 시선, 소통이 아닌 중화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가장 유능한 선동가로 변신했다.
박민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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