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3일 임동원(왼쪽 둘째) 당시 국가정보원장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신의주 특각’에서 김정일(오른쪽 둘째) 국방위원장을 만나 정상회담 의제를 조율하는 등 ‘6·15공동선언’의 밑그림을 그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이 정상회담 추진 의사를 전해왔어요. 어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현대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과 요시다라는 사람을 만나 북측의 정상회담 추진 의사를 전달받았는데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곧 제3국에서 박지원과 송호경의 접촉도 제의받았다는군요.”
2000년 2월3일 김대중 대통령은 주례보고를 하러 청와대에 들어온 임동원 국가정보원장한테 이렇게 말했다. 그러곤 “이 제의가 신빙성이 있는지,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자세히 검토해 보고하라”고 임동원한테 지시했다. 간난신고를 겪은 이다운 신중함이다. 임동원이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밝힌 사실관계는 이렇다. 박지원이 이익치한테 남북정상회담을 2000년 5~6월께에 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극비 요청을 했다. 이익치는 재일동포 사업가인 요시다 다케시한테 부탁했다. 요시다는 1월 하순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보좌하는 측근 두 사람”한테 김 대통령의 정상회담 추진 의지를 전했고, “북의 지시에 따라 2월1일 서울에 와서 이익치 회장과 함께 박지원 장관을 롯데호텔에서 만나 북측 반응을 전달하고 박 장관으로부터 정상회담 추진 의사를 직접 확인해 평양에 보고한 뒤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짚어볼 대목이 여럿 있다. 첫째, 김 대통령은 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통일외교안보 전문가인 국정원장 임동원이 아닌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한테 ‘정상회담 추진’이라는 중대 과제를 맡겼을까? 박지원이 김 대통령의 오랜 최측근 정무 참모라는 사실과 함께 남북 당국 간 공식 창구로는 한번도 성사된 적 없는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린 듯하다. 더구나 당시 북은 국정원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던 터다. “국정원 패거리들이 북남대화에 낯짝을 들이민다면 계획적인 대화 파탄 책동으로 간주할 것”(2000년 3월15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보도)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실제 정상회담 협상 과정에서 국정원의 김보현·서훈이 임동원을 도와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둘째, 민간기업인 현대가 남과 북의 사상 첫 정상회담 추진에 다리를 놓은 사실은 오랜 분단사에 전무후무할 예외적 사례라 그 함의를 다각도로 짚을 필요가 있다. ‘중재자 현대’의 존재엔 1998년 11월18일부터 분단사 최대 규모 교류협력사업인 금강산관광 사업 주체로 남북 당국과 협업하며 쌓은 인맥과 신뢰가 기반이 됐다. 흔히 당국의 일로 간주되는 정치적 신뢰 쌓기와 평화공존 노력 영역에서 ‘민간’의 중요성을 실증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민간 교류협력은 힘이 세다. 현대가 이타적이어서 발 벗고 나선 건 아니다. 현대는 금강산관광 말고도 서해안산업공단 건설, 경의선 철도 연결·복선화, 통신·전력 사업 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정상회담이 조속히 성사돼야 한다”고 이익치는 임동원한테 말했다.
셋째, ‘요시다’는 누구인가? 북한과 일본 정부, 북한과 현대를 이어준 노련한 거간꾼이다. 북-일 관계정상화 협상 시작 등의 내용이 담긴 ‘조일관계에 관한 조선노동당, 일본의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의 공동선언’으로 이어진 자민당·사회당 대표단 방북(1990년 9월), 1989·1998년 정주영의 방북과 금강산관광사업 협상 등의 거간 노릇을 했다.
남북·북-일 관계의 오랜 역사에서 당국 간 신뢰와 소통 창구가 튼실하지 못할 때 ‘거간꾼’의 활동 공간이 넓어진다. 남북관계에선 2000년 6월 첫 정상회담 이전, 그리고 남북관계가 휘청인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 거간꾼의 목소리가 커졌다. 북한과 사이에 ‘거간’을 낀 협상은 공식 당국회담과 보완 관계보다는 대체 관계의 성격이 강하다. 현대와 요시다의 도움을 받아 출발한 사상 첫 정상회담 추진 협상은 남북 최고지도자의 대리인을 내세운 특사회담 등을 통해 가속을 얻었다.
2000년 3월9일 싱가포르에서 ‘박지원-송호경’ 특사의 비밀접촉이 시작됐다. 그 시각 김대중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항구적인 평화와 남북 간의 화해·협력을 이루고자” 체계적인 구상을 담은 연설(‘베를린 선언’)을 했다. “당면 목표는 통일보다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이라며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북한 당국이 요청한다면, 민간 차원의 경협을 정부 간 협력으로 전환해 도로·철도·항만·전력·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에 적극 투자하고 비료, 농기구 개량, 관개시설 개선을 포함한 농업구조개혁 등에 협력하겠다고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우선 관심사를 콕 집어 협력 의지를 밝힌 것이다.
김 대통령은 독일행 비행기 안에서 직접 쓴 이 연설문을 발표 전 판문점을 통해 북쪽에 미리 알렸다. ‘베를린 선언’이 “단순한 선전용이 아니라 북쪽에 진지하게 제의하는 성격임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임동원은 회고했다.
‘박지원-송호경’은 치열한 밀당 끝에 4월8일 ‘3차 특사회담’에서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고, 남과 북은 4월10일 오전 10시 사상 첫 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이 금년 6월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 평양 방문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될 예정이며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것이다.”
회담이 임박하자 김 대통령은 임동원을 따로 불러 이렇게 지시했다. “아무래도 임 원장께서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다녀와야겠어요. 평양에 가서 직접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세가지 임무를 수행해야겠습니다. 첫째, 김정일 위원장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오시오. 둘째, 정상회담에서 협의할 사안들을 사전에 충분히 설명하고 북측 입장을 파악해오시오. 셋째, 정상회담 후 발표할 공동선언 초안을 사전에 합의해오시오.”
임동원은 5월27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판문점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비밀리에 방북했으나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는 데 실패했다. 일주일 뒤인 6월3일 두번째 비밀 방북해,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김 위원장을 ‘신의주 특각’에서 만났다.
임동원과 김정일의 첫 만남은 영화 관람과 와인을 곁들인 3시간 남짓한 만찬 등 밤 12시까지 이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이 바라는 ‘4대 의제’가 담긴 친서가 김 위원장한테 전달됐다.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 긴장완화와 평화, 공존공영을 위한 교류와 협력, 이산가족 문제와 기타 상호 관심사”와 함께 “실천적 조처들도 합의해 ‘공동선언’으로 발표하자는 제의”가 알짬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반응은 이랬다. “희망적인 선언 수준의 간단한 합의문건을 내면 될 겁니다. 정상회담 마치고 작성하면 돼요. 단계적으로 하나씩 합의하고 이행해나가면 되는 겁니다.”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의 평양) 도착 일정을 갑자기 하루 앞당기거나 하루 늦춰서 혹시 있을지 모를 방해세력들에게 혼돈을 주는 방안도 강구해두는 것이 좋겠어요”라고 했다고 임동원은 증언했다. 실제 북은 회담 이틀 전인 6월10일 “기술적 준비 문제”를 이유로 일정을 하루 늦췄다.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애초 합의한 6월12~14일이 아닌 6월13~15일에 열린 까닭이다.
임동원은 서울로 돌아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첫인상’을 김대중 대통령한테 이렇게 보고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며 말하기를 즐기는 타입입니다. 식견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며 판단력이 빨랐습니다. 명랑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스타일입니다. 수긍이 되면 즉각 받아들이고 결단하는 성격입니다.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말이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주제의 핵심을 잃지 않는 좋은 대화 상대자라는 인상이었습니다. 특히 연장자를 깍듯이 예우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임동원이 공개 출판물인 <피스메이커>에 밝힌 ‘인물평’임을 고려하면, 실제론 더 다차원적인 평가가 보고됐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김 대통령은 ‘김정일’을 직접 만나고 온 임동원의 보고를 받고서야 “이제 적이 안심이 된다”고 만족스러워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두개의 ‘분단정부’를 세우고 ‘3년 전쟁’을 치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분단 55년 만에 첫 정상회담을 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nomad@hani.co.kr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