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3주년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영국 랭카셔주 블랙번 의과대학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 의료진들. 로이터 연합뉴스
[세상읽기] 류영재 | 대구지방법원 판사
자라면서, 누군가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모습을 막연하게라도 상상한 적이 없다. 내가 그리는 미래는 언제나 일하며 혼자 사는 모습이었다. 처음 깨달았을 때엔 당황했다. 다음엔 궁금했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그 원인은 공포였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슬픈 공포. 이렇게 말하면 어머니가 꽤 고통스럽거나 불행한 삶을 사신 것처럼 보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중산층 가정의 일원으로서 살림과 일을 병행한 ‘슈퍼워킹맘’이다. 인생의 모진 풍파 없이 건강한 부부·가족·친구 관계를 유지하며 성실하고 명랑하게 사신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엄마처럼’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며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는 삶이 어머니의 것만은 아니다. 아버지도 그렇게 한평생을 사셨다. 성실함과 책임에 대한 공포라면 그 공포는 부모의 삶 모두를 향해야 했다. 그러나 내 공포의 타깃은 언제나 ‘엄마’였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아버지와 똑같이 일하면서도 살림을 대부분 도맡아 하는 삶, 가족의 중요한 경제적 결정에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삶, 관심사가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지 않고 사적 영역으로 수렴하는 삶, 사회적 자아실현이 삭제된 삶이다. 20대까지의 내게 ‘엄마의 삶’은 아버지의 것보다 좁고 사소하고 하찮아 보였다.
지금은 안다. 당시의 내 느낌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것을. 어머니의 삶은 좁고 사소하고 하찮지 않았다. 성의를 다해 전문성을 갖고 일하셨다. 관장하셨던 살림은 경제적 결정만큼이나 중요했다. 정치나 시사를 꿰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지혜롭게 파악하셨다. 사회관계도 넓고 단단했다. 나는 소위 세상의 눈으로 온갖 것들을 폄훼했을 뿐이다. 특수고용직의 노동 가치를 폄훼하고 살림과 돌봄의 가치를 폄훼하고 일상의 가치를 폄훼했다. 어머니의 삶은 한편으론 불평등했다. 결혼 후 전업주부가 되어 경력단절을 경험했고 경력단절 후 재취업의 선택지는 한정적이었으며 그마저도 살림과 병행할 수 있는 형태의 일자리여야 했다. 물론 어머니의 삶 마디마디 모두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당신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만, 선택지 자체가 평등하게 주어졌던가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 성역할에 대한 견고한 고정관념은 어머니의 삶 앞에 적은 선택지 몇개만을 놓아두었다.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의 삶을 살림과 돌봄과 비정규적·비정형적인 노동으로 좁혔고, 사회는 살림과 돌봄과 비정규적·비정형적 노동의 가치를 사소하고 하찮고 저렴한 것으로 폄훼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가치가 저평가되었다. 어린 나는 그러한 차별을 공포스럽게 느낀 것인데, 그러면서 동시에 어머니의 삶을 폄훼하여 차별을 완성하고 있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차별 구조는 해소되었을까. 우리나라는 2018년 여성차별철폐협약(1984년 대한민국 가입)에 따른 심의를 받았는데, 위원회는 젠더 기반 폭력 이외에도 교육·가족·노동·건강·재생산 분야 등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성차별 사안들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예를 들어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있으나 가사·육아 부담은 여전히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고, 이는 여성의 취업 및 업무 수행, 승진의 각 단계에서 장애로 작용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여성과 돌봄에 관한 차별 구조를 더욱 선명히 드러내었다. 고립으로 인해 가사·육아를 포함한 각종 돌봄 노동의 부담이 크게 증가하였는데, 그 증가된 부담은 주로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다. 감내한 만큼 여성들의 일자리는 사라지거나 열악해졌다. 전업주부의 돌봄이 노동으로 인식되거나 돌봄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 개선되진 않았다.
3월8일은 유엔이 지정한 세계 여성의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는 한국여성대회의 주제는 ‘돌봄·연대·정의―모두의 내일을 위해 오늘 페미니즘’이다. 과거와 달리 돌봄 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동시에 돌봄을 여성 개인의 몫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과제로 인식하려는 흐름이 보인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내가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다. 여전히 구조적 성차별은 공기처럼 존재한다. 어릴 때처럼 두렵진 않다. 차별을 인식하고 철폐하기 위한 연대와 노력의 역사, 차별 구조에 균열을 낸 역사를 이젠 알기 때문이다. 변화는 올 것이니 함께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