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당선자가 첫 기자회견에서 “투표 결과를 다 잊어버렸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개표 결과를 두고 국민들은 나라가 둘로 쪼개졌다고 개탄하는데, 당선자가 다 잊어버렸다고 하면 어쩌자는 건가. 승리감에 취해 개표 결과에 담긴 민심의 엄중함을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선거 운동을 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 국민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경청해야 하는지 이런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한 당선 소감이 겉치레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5년 동안 개표 결과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국정 운영의 나침반으로 삼아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10일 오전 국회에서 당선 인사 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안재승ㅣ논설위원실장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10일 새벽 3시50분 당선이 확정되고 7시간이 지난 오전 11시 기자회견을 했다. 당선 인사를 겸한 첫 기자회견이었다. 윤 당선자의 입에 국민들의 관심이 쏠렸다. 초박빙의 승부로 끝난 대선 결과를 어떻게 보는지, 선거를 치르며 더 격화된 갈등과 분열을 어떻게 치유하고 국민 통합을 이뤄낼 생각인지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회견에서도 이와 관련한 질문이 중복해서 나왔다.
첫번째 질문자로 나선 기자가 물었다.
—호남 득표율이 당의 기대치에 못 미쳤다. 국민통합·지역통합이 시대적 국정 과제로 떠오를 것 같다. 당선인의 비전과 철학은 무엇인가?
“일단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더 뒤돌아볼 이유도 없고, 오로지 국민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길만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질문의 요지를 비켜 간 답변이지만 미래 지향적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고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라고 봤는지 다른 기자가 또 물었다.
—당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굉장히 근소한 득표 차이였고 ‘젠더 갈라치기’ 전략 때문 아니었냐는 분석이 일각에서 나온다. 근소한 표 차이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TV 토론에서 자주 보였던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글쎄 저는 어제 투표 결과를 보고, 다 잊어버렸다. 그리고 저는 젠더·성별로 갈라치기 한 적이 없다.”
“뒤돌아볼 이유가 없다”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다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승리감에 취해 이번 개표 결과가 갖는 엄중한 의미를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닌지, 아니면 애써 외면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대선 결과를 두고 나라가 둘로 쪼개졌다고 개탄하는 국민들이 많다. 대선을 치르면서 적대와 대립이 더 격화돼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우려하는 국민들이 많다. 윤 후보를 지지한 국민들 가운데도 많다. 그런데도 당선자가 개표 결과를 다 잊어버렸다고 하면 어쩌자는 건가.
선거가 끝나고 대통령 당선자가 국민 통합을 강조하는 것은 늘 있어 온 일이지만, 역대 대선 중 가장 근소한 득표 차이로 당선된 윤 당선자에게 통합의 무게는 남달라야 한다.
득표율 차이 0.73%포인트에는, 진영·지역·남녀·계층 간 갈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선거판을 증오와 차별의 장으로 만든 윤 당선자가 가장 크다. 선거 막판 청년 여성들이 결집된 표로 ‘윤석열 반대’를 외친 이유다. 무엇보다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에 나서라는 명령이다.
무효표 30만8천표에도 못 미치는 24만7천표 차이에는, 윤 당선자가 거의 질 뻔했다는 경고가 담겨 있다. 그러니 오만하지 말고 독단으로 흐르지 말라는 얘기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 절반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국정 운영에 반영하라는 주문이다.
48.56%의 득표율에는, 정권교체를 원했지만 윤 당선자의 자질과 역량을 믿지 못해 표를 주지 않은 국민이 상당수 된다는 냉혹한 현실이 담겨 있다. 겸허한 자세로 부족한 점을 성찰하면서 귀를 열고 길을 물으라는 당부다.
윤 당선자 스스로 당선 확정 직후 이렇게 소감을 밝히지 않았는가. “정말 이 선거 운동을 하면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나라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게 어떤 건지, 국민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경청해야 하는지 이런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대로 하면 된다. ‘국민 통합’이 겉치레 말이 아니라면, 앞으로 5년 동안 개표 결과에 담긴 민심을 끊임 없이 되새기며 국정 운영의 나침반으로 삼아야 한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길이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0.73%포인트를 잊어버려야 하는 쪽은 따로 있다. 민주당이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얘기는 그만하기 바란다. 운이 조금만 더 따랐어도 승리할 수 있었다는 자기 위안은 부질없는 일이다. 득표율 47.8%는 이제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야 한다. 1615만 표를 근거로 6월 지방선거는 희망이 있다고 낙관론에 빠지는 순간, 2017년 대선 패배 이후 2018년 지방선거 대패와 2020년 총선 참패의 나락으로 떨어진 국민의힘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민주당이 기억해야 할 것은 ‘촛불’이 만들어준 정권을 불과 5년 만에 ‘촛불’로 쫓겨난 정당에 내줬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통렬한 반성이 필요하다. 민주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국민의힘을 응징하기 위해 나선 청년 여성들이 없었다면 참패했을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원점에서 다시 수권 능력을 키운다는 비상한 각오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그동안 누려 온 기득권을 과감히 버리고 지지자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든 ‘내로남불’이 더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민주당의 변화를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절박함과 진정성을 온몸으로 보여줘야 한다. 떠나 버린 민심을 되돌리는 길이다.
js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