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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부 건축가의 공공탐색]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록키 스텝스

등록 2022-04-17 18:05수정 2022-04-18 02:37

부부 건축가의 공공탐색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광장. 임형남 그림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광장. 임형남 그림

노은주·임형남 | 가온건축 공동대표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마비되기 직전인 2019년 4월, 이팝나무가 팝콘처럼 터지고 있었고 자목련이 흐드러지던 시절에 느닷없는 초청으로 필라델피아에 간 적이 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대학에서 강연을 부탁해왔는데, 우연히 우리의 작업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우리가 한국 건축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런 초청을 받았다는 것이 좀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지만, 영어라고는 간단한 인사 정도밖에 못 하는 터라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하는 이야기가 요즘 한국에 대해 관심이 아주 높고 건축 강연은 시청각 자료가 많으므로 한국어로 진행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 해서 마음 편하게 다녀왔다.

필라델피아는 첫 방문이었는데, 아주 좋은 봄날이었다. 그리고 도시도 무척 아름다웠다. 사람마다 어떤 장소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기준이나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도시의 스케일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필라델피아는 인간을 찍어 누르지 않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공간감과 도시에 쌓인 시간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풍성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에서 ‘가장 큰 소도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큰 도시는 아니지만 예전에 미국의 수도였고, 독립선언과 헌법이 공표되었던 인디펜던스 홀 등 건국 초기 연방정부의 수많은 유산이 남겨진 곳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경주, 일본의 교토처럼 미국의 짧은 역사 속에서는 가장 유서 깊은 도시인 것이다.

도시는 바둑판처럼 혹은 체크 무늬로 된 바닥 깔개처럼 정연하게 교차하는 가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월넛, 체스트넛, 사이프러스, 파인 등등 길에 나무의 이름이 붙어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그곳 도로명에 나무 이름이 붙은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하면, 필라델피아는 펜실베이니아주에 속해 있는데, 펜실베이니아라는 이름은 이 도시를 건설한 윌리엄 펜의 성과 숲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실바니아’의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숲의 도시에 있는 나무의 길들이 가지처럼 뻗어 나가고 있는 모습은 무척 상징적이다.

필라델피아는 윌리엄 펜에 의해 만들어진 미국 최초의 계획도시이다. 필라델피아라는 이름도 형제애라는 의미인데, 종교의 자유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자의적 추방을 당한 윌리엄 펜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또한 우리에게는 미국의 대표적인 현대건축가 루이스 칸이 활동했던 도시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그의 사무실이 있던 건물, 집터에 조성된 소공원,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유펜의 리처드 의학연구소와 교외 주택 등 칸을 기릴 만한 장소들도 열심히 둘러보고 왔다.

필라델피아의 도심은 델라웨어강과 스쿨킬강이 아래로 모이는 형상이고, 당시 도시계획의 기본인 격자형과 사선이 겹치는 방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특히 가로세로 격자의 왼쪽 모서리를 파고드는 사선이 아주 강렬하다. 그 사선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시작으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동상과 로건 스퀘어 등의 광장과 공원이 시간을 이어가듯이 생각을 이어가듯이 하나씩 나타난다. 그리고 그 종점에는 필라델피아 시청사가 있고 꼭대기에 이 도시를 건설한 윌리엄 펜의 동상이 도시를 굽어보고 있다. 도시의 구성에서 새로운 세상, 자유의 땅을 일구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도시의 왼쪽 모서리에 위치한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마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도시를 내려다보며 고전적인 얼굴로 앉아 있다. 도심을 벗어나며 길게 뻗은 길을 따라 워싱턴 동상을 지나 웅장한 계단을 오르면 ㄷ자형 건물이 둘러싼 입구 광장이 나오는데 뒤돌아보면 아래로 필라델피아가 펼쳐진다. 그러나 사실 광장보다 더 유명한 것은 그곳에 오르는 계단이다.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이 새벽 훈련을 위해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수건을 목에 두르고 달려서 계단을 오르고, 돌아서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팔을 위로 뻗고 껑충껑충 뛰던 바로 그 장소이다. 그래서 그 계단의 이름이 ‘록키 스텝스’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도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열심히 오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불우한 현실을 이겨내고 어려움 속에서 도전하는 록키의 캐릭터와, 개척가들이 큰 바다를 건너 신대륙에 자리를 잡고 유럽의 해양 강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시발점이 되었던 필라델피아라는 도시가 병치된다. 그 이미지는 무엇이든 극적인 설정으로 만드는 미국의 또 다른 정신과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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