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가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및 정의당 의원들의 청문회 보이콧으로 인사청문회가 정회되자 청문회장을 나서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한 후보자의 자료제출 부실에 항의해 청문회를 보이콧했다. 연합뉴스
정남구 | 논설위원
2011년 9월17일,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 근처에 있는 주코티 공원에 30여명의 청년 실업자가 모여들어 텐트를 치고, 월가를 비판하는 구호를 외쳤다. 탐욕에 눈먼 월가의 금융사들이 금융위기를 불러 미국 경제를 파탄 위기로 몰아가는 바람에 많은 이들이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금융사 최고경영자들은 거액의 연봉과 퇴직금을 챙기고 있었다. 이들은 그런 행태에 분노했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 노동자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는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사람들을 분노하게 한 ‘월가의 경제 지배’는 월가와 미국 행정부 간 오랜 ‘밀착’의 산물이다. 월가 출신들이 백악관 등 정부 핵심부에 대거 들어가 미국의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며 월가를 살찌웠다. 그 중심에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있다.
골드만삭스 공동 회장을 지낸 로버트 루빈은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보좌관으로 합류했다. 대통령이 된 클린턴은 그를 신설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에 임명했고, 1995년 재무장관을 맡겼다. 1997년 한국이 외채 상환 위기에 처했을 때,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 재무부의 의견을 반영해 구제금융에 가혹한 조건을 붙였다. 기업과 은행, 금융회사들이 줄도산했다. 헐값으로 떨어진 한국 기업 지분을 외국 금융자본은 주워 담다시피 했다. 월가 출신 루빈이 월가의 이익을 적극 챙긴 한 사례일 것이다.
조지 부시 행정부(공화당)는 골드만삭스와 유착이라고 할 만한 인사를 했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을 비롯해 재무차관, 백악관 경제수석보좌관, 예산국장 등을 골드만삭스 출신으로 채웠다. <뉴욕 타임스>는 이를 두고 ‘거번먼트 삭스’라고 했다. ‘골드만-워싱턴 셔틀’이라고도 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민주당)에선 루빈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전에 루빈 밑에서 일하던 래리 서머스가 국가경제위원장을, 티머시 가이트너가 재무장관을 맡았다. 골드만삭스 금융부문 대표를 지낸 게리 겐슬러가 상품선물거래위원회 위원장이었는데,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했다면 재무장관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힐러리 클린턴을 ‘월가의 앞잡이’라 공격하고, 골드만삭스를 ‘월가의 대표 기득권’으로 비판하던 도널드 트럼프(공화당)도 대통령이 되자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장, 스티브 배넌 선임고문 겸 수석전략가 등 골드만삭스 출신으로 경제팀을 채웠다.
루빈을 기용한 클린턴은 그의 능력을 높이 샀을 것이다. 루빈이 미국 경제를 이끌던 시기에 미국은 이른바 ‘골디락스 경제’(물가 안정 속에 높은 성장)를 구가했다. 문제는 월가 출신에게 경제정책을 맡긴 것이 월가의 경제 지배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행정부의 골드만삭스 출신들은 월가를 위해 금융 규제를 하나하나 풀었다. 그것이 금융위기로 이어졌음은 잘 알려져 있다. 골드만삭스는 금융위기 때도 이런저런 특혜를 받아 승승장구했다. 2006년부터 12년간 골드만삭스를 이끈 로이드 블랭크파인 회장은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7030만달러(약 752억원)의 연봉을 받았고, 그 뒤에도 여러차례 월가 연봉왕에 올랐다.
‘골드만-워싱턴 셔틀’을 떠올린 것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2017년 12월부터 4년 넘게 김앤장 고문으로 일해온 한덕수 전 총리를 새 정부의 첫 총리 후보로 지명했기 때문이다. 김앤장은 법원과 검찰 고위직 출신 변호사뿐 아니라, 정부 부처 고위직 출신도 대거 영입해 정부에도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덕수 후보자 같은 고문들은 관직 경험과 인맥을 활용해 의뢰인들의 업무를 돕는 대가로 수억원의 연봉을 받는다. 그러다가 다시 고위 공직을 맡아도, 공익을 제대로 수호할 수 있을까? 사람과 자리를 모두 망치는 건 시간문제다. 자신에게 로비를 하던 사람이 언제 상관으로 올지 모르는 나라에서 공직 기강이 바로 설 리도 없다. 그 길이 더 다져지기 전에 끊어야 한다.
2014년 5월 박근혜 정부에서 총리 후보로 지명된 안대희 전 대법관은 5개월 동안 변호사 수임료로 16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자 6일 만에 사임했다. 판검사든 정부 부처 고위 관리든 공직에서 물러난 뒤 ‘과거 관직’을 팔아 돈을 벌었다면 다시 공직을 맡을 생각을 버려야 한다. 염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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