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약삐약북스의 ‘지역의 사생활 99’ 프로젝트 시즌1 작품들. 삐약삐약북스 제공
[한겨레 프리즘] 서정민 | 문화팀장
충북 제천·단양을 좋아한다. 2005년 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취재차 제천을 처음 찾았다가 산과 물(청풍호)에 반하고 말았다. 이후 때마다 제천 여행을 떠났고, 차차 이웃 지역 단양까지 넓혀나갔다. 그렇게 다녔어도 몰랐던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1985년 충주댐이 생기면서 단양군 단성면 마을이 통째로 수몰됐다는 사실, 비가 많이 올 때 서울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충주댐 수문을 닫는 바람에 단양이 수해를 입은 적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게 된 건 만화 <단양―가만히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다. 전북 군산의 독립만화 전문출판사 삐약삐약북스가 ‘지역의 사생활 99’ 프로젝트의 하나로 낸 만화책이다. 이를 그린 불키드(본명 김영석) 작가와 역시 프로젝트의 하나인 <군산―해망굴 도깨비>를 그린 불친(본명 전정미) 작가는 부부다. 호남 출신인 둘은 수도권에서 웹툰 작가로 활동하다 지친 나머지 단양으로 이사했다. 고시원을 벗어나 작은 주공아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가 생기면서 부모님이 사시는 군산으로 왔다.
둘은 군산시 청년창업지원사업에 선정돼 2019년 삐약삐약북스를 세웠다. 그리고 시작한 첫 프로젝트가 비수도권 지역 작가들이 그곳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내는 ‘지역의 사생활 99’다. 2020년 시즌1 9편, 지난해 시즌2 9편을 출간했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한국만화가협회 등이 주관하는 ‘오늘의 우리만화’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지금은 시즌3을 준비 중이다. “10년 전에는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게 필요했지만, 이제는 온라인, 에스엔에스(SNS) 등의 발달로 지역에서도 한계를 크게 못 느껴요. 그래서 지역으로 옮겨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느는 추세죠. 이 프로젝트를 99곳까지 하는 게 꿈이에요.”(전정미 대표)
고향으로 간 예술가는 또 있다. 서울 홍익대 앞 인디신에서 2006년 듀오 ‘하찌와 티제이(TJ)’로 데뷔한 싱어송라이터 조태준이다. 그는 2년 전 고향 부산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부산 출신들을 많이 봤어요. ‘부산에도 음악신이 있어서 서울까지 안 올라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나중에 부산 가서 음악신 만드는 데 보탬이 돼야겠다’고 결심한 걸 실천한 거죠.”
그는 지난해 부산 사투리 랩을 넣은 노래 ‘부산그루브’를 발표한 데 이어, 올해 밴드 ‘조태준과 부산그루브’를 결성해 매달 클럽에서 공연하고 있다. 밴드 멤버의 국적은 한국·미국·뉴질랜드·불가리아로 다양해도 다들 ‘부산 사람’이다. 오는 31일 부산 경성대 근처 클럽에서는 이들뿐 아니라 다른 부산 밴드들도 무대에 오른다. “초창기 홍대신 생각이 많이 난다. 부산신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는 그는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철규 작가가 자신의 주름 연작 작품들 앞에서 웃고 있다. 서정민 기자
지난 6일 전주국제영화제에 갔다가 김철규 작가와 술잔을 기울였다. 어릴 때부터 전주에서 자란 그는 군산대 미대를 나와 줄곧 전주를 기반으로 작업해왔다. 서울 홍익대 대학원도 전주에서 통학했다. “가끔 서울서 전시할 때 주목받다가도 다시 전주로 오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기분이었어. 서울을 베이스로 활동했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 그는 몇년 전부터 사람의 주름을 테마로 하는 연작 작업을 해오고 있다. 캔버스에 여러 색 물감을 겹겹으로 입힌 뒤 사포로 갈아내며 형상을 만드는 작업이기에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든다. 처음엔 주름으로 인생 역경을 표현했지만, 이제는 주름을 밝고 아름답게 승화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럼으로써 늙고 나이 듦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자는 개념을 정립하면서다.
서울에서 활동하지 않은 걸 후회하진 않냐고 물었더니 그는 말했다. “사실 기회도 있었어. 근데 그게 정답은 아닌 것 같아. 그랬다면 삶에 찌들어서, 트렌드 따라가는 데 급급해 지금 이 작업은 못 했을 거야. 여기서 먼 산도 보고, 누가 뭐라든 신경 안 쓰니까 내 색깔 만들며 여기까지 온 것 같아. 앞으로도 길게 보고 소처럼 걸어가야지.”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