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 경총회관에서 열린 정책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한겨레 프리즘] 한광덕 | 경제팀장
샤워기의 수온 조절이 정교하지 못하면 뜨거운 물과 찬물을 오가며 몸이 힘들어진다. 경기 냉각을 막기 위해 아궁이를 지폈더니 물가에 불이 붙었다. 화재를 진압하려 물줄기를 뿜어대니 경기가 떠내려갈 판이다.
물가는 뜨뜻미지근해야 경제에 좋다고 한다. 소비자들이 꾸준히 물건을 사니 생산과 고용이 늘어난다. 물가가 떨어지거나 0에 가까우면 사람들은 느긋해져 물건을 잘 안 산다. 물가가 급등하면 조바심에 미래의 소비까지 당겨 집행한다. 인플레이션은 누구에게 유리할까. 물건 값이 오르면 돈 가치가 떨어진다. 갚아야 할 현금 부담이 줄어드는 채무자에게 좋은 일이다. 채권자에게는 좋지 않다. 예금에 돈을 넣어두면 물가가 오른 만큼 실질가치가 떨어져 사실상 손해다. 주식시장도 하락해 자산가들은 인플레를 싫어한다. 원론적으로만 보면 인플레는 부와 소득을 채권자에게서 채무자로 이전시킨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코로나19처럼 인플레도 불균등하게 침투하기 때문이다. 식료품과 유류 가격 급등으로 저소득층의 고통이 훨씬 커지고 있다. 인플레를 ‘빈곤세’라 부르는 이유다. 역진적인 세금 인상과 같다는 얘기다. 게다가 인플레 시기엔 어김없이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린다. 그러면 인플레로 떨어진 돈의 값이 반등한다. 부유층 이자소득은 다시 늘고 빚이 많은 빈곤층 이자부담은 가중된다. 그렇게 부의 양극화가 더 깊어진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최근 ‘물가-임금 연쇄 상승 악순환’을 우려하며 과도한 임금 인상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많이 듣던 얘기다. 통화공급으로 뒷받침되는 확대재정정책은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을 초래한다는 통화주의 학파의 주장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에서도 임금과 물가가 동시에 급등하는 ‘임금-물가 연쇄 상승 순환구조’ 논쟁이 벌어졌다. 물가 상승→기대 인플레이션 상승→임금 인상→생산비용 증가→제품가격 전가→물가 상승이 반복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미 연방준비제도는 임금-물가 연쇄 상승의 증거가 뚜렷하지 않다고 봤다. 제롬 파월 의장은 5월 통화정책회의에서 “최근의 임금 상승은 노동시장의 수급 불균형에 의한 것”이라며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시장에 복귀하면서 임금 상승이 둔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최근 물가가 높아진 건 재정지출이나 임금 인상 탓이 아니라 독과점 거대 기업들이 가격을 올릴 수 있을 만큼 권력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5월 미국 노동자의 시간당 평균임금은 전년보다 5.2% 올랐다. 코로나19 이전 3%대보다는 높지만 올해 3월(5.6%) 이후 두달 연속 둔화했다. 임금 상승 압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미 메트라이프생명은 “구름이 조금 더 깊어지기 전 마지막 햇빛일 수 있다”고 비유했다. 임금 상승률은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생산직과 비관리직에서 컸다. 이들 저임 노동자들은 지난 40년 동안 물가 상승률보다 낮은 임금을 받아오다 최근 구인난이 심해지면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격(임금) 상승이 이뤄졌다. 반면 같은 달 미국 소비자물가는 40여년 만에 최대인 8.6% 올랐다. 봉급이 늘어도 물가가 더 높아져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약해진 구매력을 보전받기 위한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는 불가피해졌다.
한국 가계의 월평균 소득도 최근 늘었다. 하지만 6%대로 치솟은 물가 상승률, 높아진 주거비 부담 등을 고려하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복합위기’일수록 임금 인상을 악순환이 아닌 선순환의 고리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고용노동부가 공식 블로그에 올린 최저임금에 관한 설명은 이렇다. ‘최저임금 인상은 가계의 소득을 올려 소비를 늘리고, 이를 통해 기업 투자와 생산이 확대되며, 다시 소득 증가로 이어진다. (…) 최저임금이 인상된다고 그만큼 물가가 오르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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