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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학습권을 요구하라, 더 과감하게

등록 2022-07-06 15:18수정 2022-07-07 02:40

‘연세대학교 비정규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학교 곳곳에 붙인 학내 청소·경비 노동자 투쟁 지지 대자보. 공동대책위원회 제공
‘연세대학교 비정규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학교 곳곳에 붙인 학내 청소·경비 노동자 투쟁 지지 대자보. 공동대책위원회 제공

[세상읽기] 조문영ㅣ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 학기가 끝났다. <빈곤의 인류학>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여전히 기말보고서를 다듬고 있다. 2021년 2월 국토교통부가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일대를 공공주택지구로 만드는 사업을 발표했으나, 일부 소유주들의 반발로 사업은 표류 중이다. 나와 학생들은 개발, 거주, 생명의 의미를 톺아보고 공존의 윤리를 모색할 핵심 현장으로 동자동을 바라보고 현장연구를 수행했다.

학생들은 열의가 넘쳤다. 대학 와서 바랐던 활동들이 한동안 멈춘 게 억울해서였을까. 나보다 더 집요하게 인터뷰 참여자를 섭외했다. 정부 부처나 연구실에 계속 전화하고, 보좌관과 물밑 접촉을 하고, 헐거운 인맥이라도 총동원해 전직 국토교통부 장관, 주무관, 한국토지주택공사(LH) 담당자, 연구원, 활동가, 소유주, 쪽방촌 주민 등 다양한 행위자들을 만났다. 다른 쪽방촌을 둘러보고 인터뷰하러 대전, 진주, 세종까지 종횡무진했다.

팀으로 나뉘어 움직이던 학생들이 대통령 취임 이튿날 용산에서 열린 ‘동자동 쪽방촌 선이주 선순환 공공주택지구지정 촉구 주민결의대회’에 한데 모였다. 몇몇 학생이 노래 공연과 연대 발언으로 힘을 보탰다. 한 학생이 발라드곡을 부르자 주변 상인들이 시끄럽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동자동 쪽방촌 주민자치조직에선 외부인 연대 발언이 너무 많았던 게 아닌지 우려했다. 반면 한 소유주는 인터뷰에서 “학생들이 (집회에) 놀러 간 건지 신념이 있어선지 모르겠다. 후자라면 위험하다”며, 쪽방촌 주민 중에 성폭행범이 얼마나 많은가를 겁박하듯 강조했다. 집회를 두고 여러 목소리가 오갔다. 나와 학생들이 토의할 내용도 자연히 많아졌다.

그날의 집회가 떠오른 건 최근 청소·경비 노동자를 상대로 한 연세대 재학생들의 고소 때문이다. 학생 3명이 집회 소음으로 학습권을 침해당했다며 배상을 요구했다. 고소인 학생과 내 수업 학생들은 집회와 사뭇 다른 관계를 맺었다. 후자에겐 집회가 곧 수업이었다. 집회가 시끄럽다고 상인들이 따질 때 미안했지만, 다 함께 모아 내는 함성이 절실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모이지 않으면 버려진다. 서울시장이 “약자와의 동행”을 선언했다고 별안간 마이크가 주어지는 게 아니다. 유난히 무더웠던 오후, 질병과 장애로 만신창이가 된 몸들이 아스팔트 위에서 기를 쓰고 버틴 이유다.

연세대 청소·경비 노동자들도 절박하기는 매한가지다. 불안정 노동과 비인간적인 처우를 합법화한 비정규직 문제가 핵심이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비대면 수업으로 텅 빈 캠퍼스에서 노동자들은 외롭게 싸웠다. 올해는 다행이다 싶었다. 집회 중에, 집회 사이로 사람이 지나간다. 볼 수 있다.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됐다.

학습권이란 게 모든 잡음을 소거한 채 교수의 말을 흡입하면 보장될까? 그런 학습은 인강으로 충분하다. 대학에서 학습권은 내가 배운 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때로 논쟁적으로 되짚을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할 권리를 포함한다. 학교가 환경을 미화한답시고 노동자들이 내건 현수막을 바로 떼어내는 행태는 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다. 현수막을 읽고 생각할 권리도 학습권이기 때문이다. 고소인들이 소음 시위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으로 규정하며 학습권의 의미를 축소한 데는 대학 책임도 크다. 고시 응시생을 위해 학교는 ‘학습’ 공간까지 마련하고, 동네 이장처럼 합격 현수막도 걸어준다. 대통령이 ‘반도체’, ‘인공지능’을 외치면 아무 과정이라도 급조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 대학의 학습이 정부와 기업의 눈높이를 맞추느라 한껏 앙상해졌다. 원청인 대학이 ‘법’을 들어 노동자를 외면하고, 학생도 ‘법’을 들어 노동자를 심판하니 도긴개긴이다.

<빈곤의 인류학> 수업을 듣다 종적을 감춘 학생한테 뒤늦게 장문의 메일이 왔다. 학내 비정규 노동자들과 연대해온 이 학생은 신촌·국제캠퍼스 청소·경비노동자 시위, 세브란스병원분회 노조와해 저지 투쟁, 수업 외 노동에 대한 수당 지급과 시급 인상을 요구하는 한국어학당 강사들의 파업까지, 한 대학에서 동시다발로 터진 사건들과 씨름하다 탈진했다. “연세대학교는 저에게 제대로 된 배움의 장이 되지 못한 지 오래됐습니다.” ‘요즘 20대’라는 수사가 익숙한 사람들한테 덧붙이자면, 이 학생도, 고소인 학생도 모두 동시대 청년이고, 세상에 한껏 고개를 숙인 대학에서 학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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