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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 칼럼] 분노로 일렁이던 눈가에 이슬 한방울

등록 2022-07-28 18:03수정 2022-07-29 02:37

초등학생 때 전쟁기념관은 견학할지언정 노동조합을 찾지 않으며, 중학생 때 모의 노사협의를 하는 일이 없고, 고등학생 때 ‘노동조합이 민주주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국가경쟁력,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등 객관적 진리로 포장된 지배세력의 관점과 이념을 주입받는다. 수많은 노동자가 자본 편에 선다.

홍세화 |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너희들은 자본 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럴듯한 말 뒤에는 더 많은 돈을 모으려는 짐승 같은 허기만이 있을 뿐이다. ‘짐승 같은’이라고 말했지만, 이 표현은 짐승에 대한 모욕이다. 왜냐하면 짐승은 배가 부르면 먹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나치 선전상이 되기 전 은행원이었던 시절 괴벨스가 노트에 쓴 말이다. 인플레로 물가가 치솟자 대토지와 건물 소유주들은 부유해졌지만, 곤경에 처한 서민들의 작은 토지들을 헐값에 사들이면서 재산을 엄청나게 긁어모았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축적하라! 자본운동의 제1법칙은 윤석열 정권의 “부자감세 좀비”(폴 크루그먼)에 힘입어 맹렬하게 관철될 참이다. 신종 좀비는 주식 투자를 통하면 천억원까지 양도세나 상속세를 내지 않게 해주는 신공도 펼친다. 소유에 일시 소유는 없고, 자손만대 영구적이다.

<조선일보>가 대우조선해양 본사를 따라 “파업노동자들이 회사에 8천억원의 손해를 입혔다”고 썼다. 손배소 폭탄을 투하할 것을 종용하고, 윤 정권은 “법대로 원칙대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고 화답한다. 물경 8천억원! 삼척동자도 말할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손해를 입을 거라면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기 전에 요구사항이었던 임금 30% 인상을 해줬어야 마땅한 게 아닌가. 20년 넘게 일한 노동자들의 시급이 최저임금에서 기백원 많은 터라면, 더욱이 30% 인상 요구가 원상회복일 뿐이라면! 결국 4.5% 인상에 머물렀는데, 민형사상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한다. 손배 가압류가 어른댄다.

시민단체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 윤지영 변호사가 말했다. 손배 가압류는 기업의 손해보전이 아닌, 노동자들의 손발을 묶는 게 목적이라고. 또 터무니없는 청구액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사용자의 책임을 희석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고. 실제 손배 가압류는 두산중공업 배달호 노동자를 불사르게 했고, 한진중공업 김주익·최강서 노동자가 목을 매게 했으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 사악한 법을 없애기 위해 ‘손잡고’가 결성됐을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말했다. “손해배상과 가압류의 남용은 노동3권을 무력화시키는 부당한 처사입니다. … 절망 속에서 세상을 떠난 분도 여럿입니다. … 노조법 개정안 노란봉투법을 관철해낼 것입니다.”

그 뒤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한국도로공사, 금호타이어, 한국지엠(GM), 아사히글라스, 유성기업 등 노동자들이 손배 가압류 대상자 목록에 추가됐고, 그사이 민주당이 180석을 차지했으나 노란봉투법은 지금껏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국제노총(ITUC)이 지난달 28일 전세계 148개국 노동권 수준을 평가한 글로벌 권리 지수를 발표했다. 6개 등급 가운데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는 튀르키예(터키)와 함께 5등급으로 분류됐다.

우리에겐 유소년 시절 메이데이에 노동자 아버지의 목말을 타거나 노동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거리행진에 나선 경험이 없다. 초등학생 때 전쟁기념관(전쟁을 기념한다!)은 견학할지언정 노동조합을 찾지 않으며(찾을 수 없으며―학부모가 인솔 교사를 고발한다), 중학생 때 모의 노사협의를 하는 일이 거의 없고, 고등학생 때 ‘노동조합이 민주주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초중고 사회 시간을 통틀어 자본주의에 관한 공부는 거의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국가경쟁력,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등 객관적 진리로 포장된 지배세력의 관점과 이념을 주입받는다. 수많은 노동자가 자본 편에 선다.

민주공화국의 시민도 드물다. 황국신민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소비자, 고객이 됐다.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알베르 카뮈의 말에서 ‘우리’는 공화국 시민을 가리킨다. 1871년 5월28일 새벽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벽에서 즉결 총살된 파리코뮌 전사들이 마지막으로 외쳤던 “공화국 만세!”에 담긴 공화국의 의미가 우리에겐 티끌만큼도 없다. 대신 재벌공화국, 삼성공화국, 검찰공화국이 난무한다. 가치는 사라지고 지배 형태만 남았다.

고대 로마시대에 가뭄이 오면 귀족용 전용 수도를 제일 먼저 끊었고, 공중수도를 마지막까지 흐르게 했다. ‘공화국’(republic)의 라틴어 어원이 ‘res publica’(공적인 일, 공중(公衆)의 것)였다. 오늘날 교육, 의료, 주거 공공성의 시원이 지금도 로마나 스페인 등지에 남아 있는 수도교(하천이나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상하수도를 받치려고 만든 다리) 유적으로 알 수 있는 ‘물의 공공성’이었다. 그 가치는 프랑스대혁명 직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조 제2항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익을 바탕에 둘 때만 가능하다”에 담겼다.

역사학자 김기협은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을 넘어>에서 “중국과 한국의 군주제는 공공성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고 비록 상하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갖는 상당 수준의 민주적 원리가 포함되었다”고 쓰면서, 사마천의 ‘혹리열전’(酷吏列傳) 서문을 소개했다. “정(政)과 형(刑)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이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므로 덕(德)과 예(禮)로 다스려야 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는 내로남불이 부끄러움을 완전히 몰아낸 사회다. 이명박 정권으로부터 박근혜, 문재인을 거쳐 윤석열 정권까지 어떤 정치철학 아래 어떤 정책을 펴기 위해 집권했는지 알 수 없는 한편, “법은 힘센 자의 권리”(크로폿킨)라는 말이 적용되므로 서로 정(政)과 형(刑)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일차적 목적의 권력다툼을 치열하게 벌인다. 자기 사람에게 국가의 괜찮은 일자리를 주는 부차적 목적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자본의 마름이 되어 노동 탄압에 나선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정치는 본디 고귀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연대의 실현을 소명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벽안의 신부님의 말에 담긴 정치는 우리에겐 신기루일 뿐이다.

벨기에 겐트시의 성에 있는 ‘고문 도구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마녀사냥 시절에 사용되었던 쇠사슬, 밧줄, 도르래, 결박틀과 그것들의 조합인 고문 도구들이 즐비했다. 대부분이 몸의 일부를 결박하고 다른 일부를 잡아 늘이는 방식이었는데, 이런 공통점에서 벗어난 게 있었다. 세 변이 60㎝쯤 되는 정육면체 감방이었다. 피고문자는 그 안에서 웅크린 자세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조금 큰 0.3평 쇠감옥에서 31일 동안 갇혀 있다 나온 유최안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말했다. “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만나봤어요.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인간답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분노로 일렁이던 누군가의 눈가에 이슬방울 하나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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