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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공단 숲에 가려진 망향비

등록 2022-09-20 18:33수정 2022-09-21 02:35

세죽옛터비. 울산광역시 남구 페이스북 갈무리
세죽옛터비. 울산광역시 남구 페이스북 갈무리

[전국 프리즘] 신동명 | 전국부 선임기자

신라 49대 헌강왕이 지방 순행 중 구름과 안개 때문에 길을 잃었는데, 일관의 말에 따라 근처에 동해 용을 위한 절을 짓게 하면서 바로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 붙여진 곳이 울산 남구 개운포다. 그때 동해 용이 일곱 아들과 함께 왕 앞에 나타나 곡을 연주하고 춤추며 기뻐하고 아들 하나를 왕에게 보내 따르도록 했는데, 그가 처용이다. <삼국유사> 속 이 이야기는 신라 후기 강해지는 지방호족 세력에 대한 중앙집권층의 회유 과정과 연관된 것으로 학계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개운포는 고대 강력한 해상세력 근거지였고, 조선 초기 수군만호진이 설치됐다가 세조~중종대 80여년 동안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주둔하기도 했다. 처용이 나타났다는 작은 바위섬 처용암과 수군절도사가 주둔했던 개운포성 터는 현재 울산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처용암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바닷가 세죽마을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50여가구 주민이 김·굴 양식과 통발어업 등을 하며 풍요롭게 살던 곳이었다. 특히 마을에서 처용암과 근처 목도(동백섬·천연기념물 65호)까지 나룻배가 오가는 봄이면 상춘객이 몰려들어 울산은 물론 부산·대구·경남북 각지에서 대형 관광버스가 하루 50여대까지 줄을 잇고 마을 횟집 10여곳이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하지만 주위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1990년대부터 주민들이 모두 이주해 지금은 마을이 통째로 없어지고 망향비(세죽옛터비)만 남았다. 세죽마을뿐 아니다. 근처 황암·용연·남화·용잠마을 등도 공단과 화력발전소, 신항만 등 건설로 모두 사라졌다. 대신 현대미포조선 용연공장 뒤, 한국동서발전 울산화력본부와 에스케이(SK)가스 울산기지 담장 밖 등 외진 곳에 망향비(옛터비)가 세워져 과거 이곳에 사람이 마을을 이뤄 살았음을 알게 할 뿐이다.

망향비는 각 마을 향우회의 노력과 기업체 협조로 소공원과 함께 조성돼, 사라진 옛 마을 주민들이 고향 마을의 추억을 되새기고 향수를 달래는 공간이 된다. 하지만 대규모 공단 안에 있는 탓에 평소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고, 그 존재를 알리는 안내판조차 없다. 마치 드러나선 안 될 치부를 가리기라도 하듯 숨겨져 있다.

울산에선 1962년 박정희 군사정부의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뒤 정유공장이 들어선 남구 고사동부터 주민 집단이주가 시작돼 1990년대까지 계속됐다. 공장 터 확보를 위해 마을을 수용하면서 처음 시작됐고, 뒤에는 공단 공해와 환경오염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게 돼 집단이주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영구히 고향을 잃고 울산 안 다른 곳으로 삶터를 옮겨야 하는 실향민 신세가 됐다.

개운포 성암근린공원 망향탑에는 “조국 발전과 공업도시로 태어나는 울산을 위해 공해에 찌든 사랑하는 고향을 두고 떠나간 3만여 10개 동 그리운 얼굴들 어느 하늘 아래 어떻게 살고 있나요?”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전체 이주민 규모와 이들의 고향을 그리는 애절한 심경을 알 수 있다.

60년 전 박정희 대통령은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치사문에서 “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울산은 자동차·조선·석유화학 등 국가 기간산업의 전진기지로 개발돼 오늘날 산업수도로 성장했다. 그 이면에는 대를 이어 살아온 정든 고향에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된 공단 이주민의 아픈 역사가 있다.

이들의 옛 삶터를 표시한 망향비마저 더는 공단 숲에 가려져선 안 된다. 처용암과 개운포성터는 울산시가 자랑하는 문화재요 지역 명소다. 이들 명소와 가까이 있는 공단 이주민의 여러 망향비도 시민·관광객의 관심과 발길이 필요하다. 빈곤탈출과 경제개발이란 국가적 소명을 위해 실향의 아픔을 감내한 공단 이주민의 이야기는 우리가 반드시 알고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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