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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베의 국장을 생각하다

등록 2022-09-25 18:01수정 2022-09-26 02:39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하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하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세계의 창] 야마구치 지로 |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영면하고 전세계가 조의를 표한 뒤인 오는 27일 일본에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이 예정돼 있다. ‘진짜 국장’을 본 많은 일본인은 아베 전 총리의 국장을 치르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을 표하고 있다. 이달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장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이 지난 17~18일 실시한 조사에선 국장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62%로 찬성(27%)보다 두배 이상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일본 여론을 보면 정부 정책에 강하게 반대 의견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이번에 국장 반대론이 커지는 것은 그만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강행하는 국장이 헌법과 민주주의를 훼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젊었을 때 공화제 지지론자였다. 군주제는 평등원칙을 위반하는 것으로 인간이 무지했던 시절의 유산이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인간은 군주의 권위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됐다. 선진국의 통치 방법은 민주주의에 기반한다. 국민의 의사(실제는 다수 의사)에 따라 지도자를 결정하고 규칙을 만든다. 다만 국민이 결정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다. 사심 없이 일하는 군주라는 존재가 지도자를 임명하고, 규칙을 알리는 것도 어쨌든 세상을 위하는 일이라고 납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에게는 이론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사심이 없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엄청난 속박이자 무거운 짐이다. 싫고 좋음을 드러내기 힘들다는 것은 재미없는 인생이 분명하다. 항상 환한 미소를 지으며 국민의 행복을 기원하는 군주는 초월적인 인물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덕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군주를 존경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를 국민의 이름으로 거행하는 것은 멀리 일본에서 봐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장이라는 의식은 이처럼 입장과 사상을 뛰어넘어 누구나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을 추모하기 위한 것임을 영국의 사례를 보고 절감했다.

기시다 총리가 아베 전 총리에 대해 국장을 결정한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아베 전 총리는 권력자였다. 정치가는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기본 전제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이상과 이념’을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여러 정치인이 각자 자신의 신념을 호소하고 지지를 받기 위해 경쟁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가치관이 다양하고 이해관계 충돌이 있는 현실에서는 권력자가 내세운 이상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다. 예부터 덕이 있는 정치인은 반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성심을 다해 설득하고 찬성 세력을 늘리려는 노력을 해왔다.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 전 총리는 ‘친척이 열명 있으면 한명 정도는 공산당도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아베 전 총리는 성실하게 설명하는 정치인과 거리가 멀었다. 야당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일이 반복되면서 아베 정권 당시 국회는 논의의 장이 되지 못했다. 그는 의견이 다른 경쟁자를 존중하는 자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에 더해 국유지를 친구가 경영하는 학교법인에 싼값에 양도했다거나 정부가 주최하는 ‘벚꽃을 보는 모임’ 행사를 자신의 후원 회원을 위해 사적으로 활용하는 기회로 삼았다. 아베 정권 때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했다.

정치가가 사망했을 경우 관행에 맞게 조의를 표해야 한다. 이번이 사적인 장례였다면 아베 전 총리의 비극적인 죽음에 애도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장례가 치러진다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동의할 수 없다. 권력자의 행동은 항상 사실에 근거해 검증과 추궁을 해야 한다. 아베 정권 당시 권력형 범죄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이 있다. 비극적인 죽음이라고 해서 그가 생전에 일으켰던 문제가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국민의 당연한 상식을 앞에 두고 기시다 정권은 스스로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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