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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군대, 남자다움, 그리고 외계인

등록 2022-10-23 17:50수정 2023-07-03 15:31

박경근 <군대: 60만의 초상>(2016, 2채널 HD 영상 설치). 삼성미술관 리움 ‘아트스펙트럼 2016’ 전시 도록
박경근 <군대: 60만의 초상>(2016, 2채널 HD 영상 설치). 삼성미술관 리움 ‘아트스펙트럼 2016’ 전시 도록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군대(Army)를 몰고 다니던 방탄소년단 구성원들이 방탄 옷을 벗고 이제 맨몸으로 군대의 일원이 되기로 했다. 입대의 의지를 먼저 밝힌 맏형 진이 올해 서른살이 되었다고 하니, 자신들의 노래보다는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와 ‘이등병의 편지’가 더 어울리는 상황이다. ‘서른 즈음에’는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젊지만 풋풋하지만은 않은 나이, 서른 무렵에 대해 읊은 것이고, ‘이등병의 편지’는 익숙한 일상들에 이별을 고하면서 이제 낯선 환경에 새로 길들여질 자신의 내일을 생각하는 곡이다.

‘이등병의 편지’ 속 주인공은 집을 떠나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선다. 쓸쓸한 선율에 착잡한 마음 상태가 깃들어 있는 그 부분에서 나는 미디어아트를 하는 박경근(1978년생)의 17분짜리 영상작품 <군대: 60만의 초상> 중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박경근의 영상작품은 ‘이등병의 편지’처럼 센티멘털한 분위기는 아니고 담담한 편이다. 젊은 남자들이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짧게 자르고 어설픈 자세로 경례한다. 박경근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이들의 병영 생활을 보여주는데, 특별한 내용을 다루지는 않았고, 통제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들의 신체에만 시선을 모으게 했다.

카메라는 의장단의 흰 장갑을 낀 손, 죽 늘어선 장총, 그리고 무표정의 얼굴들에 집중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제각기 다르게 살아온 청년들이 차츰 행과 열을 맞추고, 하나의 동작으로 만들어져 가는 모습을 들추어낸다. 작가가 영상에 담은 군대 생활이란, 개성을 버리고 전체의 일부가 되는 걸 몸으로 익히는 과정인 모양이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남자에게 군대는 선택의 여지 없이 다가오고 이루어진다. 그래서 군대와 관련된 문장은 전부 수동태이다.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어 소집된 것이고, 휴가를 낸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다. 그런데도 오래전 내 아버지는 남자는 군대에 다녀와야 진짜 남자가 되는 거라는, 아들뿐 아니라 딸도 심하게 거부감을 느낄 만한 말씀을 곧잘 하셨다. 훗날 알게 됐는데, 진짜 남자, 즉 남자다움은 군대처럼 남자들끼리 공동생활을 하는 곳에서 획득된다는 주장이 실제로 있기는 했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은 저서 <과거와 현재>에서 남자들만의 공동수련을 옹호했고, 남자다움이 그 이유였다.

영국은 근대국가의 모습을 형성하면서, 국가가 기대하는 남자의 역할이 커졌고, 더불어 남자다움의 개념도 명확해졌다. 남자다움이란 어리광과 투정을 부린다거나, 남의 탓을 한다거나 충동적이라거나 나약함과는 상관없는, 어른스럽다고 받아들여질 만한 가치들을 의미했다. 또한 1등급 국민에 속할 자격을 뜻하기도 했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이튼의 운동장에서 쟁취되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이튼학교는 영국 고유의 유서 깊은 기숙학교인 퍼블릭스쿨로, 남자다움의 양성을 목표로 오직 소년들만 다닐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개인의 신체 단련과 공동체 의식을 동시에 염두에 둔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예를 들면 크리켓과 같은 집단 스포츠를 교육수단으로 활용하여, 학생들이 공동체로 묶여 상호협조하고, 정당한 방식으로 공격하고 방어하도록 가르쳤다. 학생들은 기숙생활 동안 강인한 개인이면서 더 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경험으로 습득했다. 모든 수련 과정이 끝날 무렵엔 그들은 성취감과 함께 한 단계 성숙해졌다는 자부심으로 무장하게 됐단다. 이러한 자부심이 바로 공동수련 생활에서 얻는 남자다움의 원천이었다.

영국의 퍼블릭스쿨을 예찬할 목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군대는 그곳을 거쳐 간 구성원들이 진짜 남자, 진짜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곳인지 한번쯤은 짚어보기 위해서 두서없이 예시를 찾은 것뿐이다. 언제부터인가 군대는 젠더 논쟁의 중심에 놓이게 되어, 여럿 있는 자리에서 입에 담기 예민한 단어로 변해 버렸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도 “내가 군대에 있을 땐 말이야”라고 자랑하지 않을뿐더러, 여자로 태어나 딸만 낳고 사는 사람이라면 군대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는 편이 낫다. 그렇게 군대에서의 경험은 덮어두어야 할 상처가 되거나 침묵으로 파묻히고 있다.

개인에게 군 시절은 젊음의 이야기가 벌어지고, 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그런데 군 복무를 마치고 온 사람들이 자부심 대신 피해의식에 사로잡힌다거나, 원치 않는 비행선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외계인처럼 느낀다니, 그게 60만의 초상일 수도 있다니 참으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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