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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무력하지도 해를 끼치지도 않는 말

등록 2022-10-25 18:35수정 2022-10-26 02:38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 대통령실사진기자단, AP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 대통령실사진기자단, AP연합뉴스

[세상읽기]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한달 전쯤 <한겨레>로부터 정기 기고 제안을 받았다.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얻는 게 연구자에게 흔치 않은 기회지만, 요 근래 말의 효용에 회의를 품던 터라 선뜻 수락하기 어려웠다.

한두해 정도 공론장에 발언을 더하며 관찰하고 깨달은 것은, 대개 말의 무력함이었다. 당장 감염병이 퍼지고 사람이 죽어가는 통에 “장기적인 ‘일상회복’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니 얼마나 한가한 말인가. 대체인력이 없어 한명이 빠지면 다른 사람이 죽을 고생을 하는 상황에 “아프면 쉬어라”는 말이 먹힐 리 없다. 피가 튀도록 사람을 갈아넣어야 겨우 수지를 맞추는데 “안전수칙 준수하라” 이 한마디가 무슨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나는 할 말 했다’며 스스로 위로할 뿐, 말이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공허한 외침이 흩날리다 사라지면 그나마 다행이다. 동조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려 쉽게 뱉은 말은 때때로 치명적인 해를 끼치기도 한다.

영국의 최단명 총리 리즈 트러스도 말의 덫에 걸렸다. 후보 시절 감세와 규제 완화를 내세워 보수당원들의 지지를 얻어낸 그는, 당선 뒤 거시경제 상황을 무시한 채 자기 말을 지키는 데만 집착했다. 대책 없는 감세안 발표에 환율과 금리가 요동쳤다. 영란은행의 개입에도 시장이 안정되지 않고 금융위기 가능성까지 제기되자, 결국 트러스는 감세안을 철회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영국 내각제 역사상 가장 빠른 45일 만의 퇴진이었다.

차라리 말을 급하게 주워 담는 편은 나았다. 최근 이탈리아 총리로 선출된 ‘이탈리아형제들’(FdI)의 조르자 멜로니가 그랬다. 그간 그는 자유무역, 이민, 성소수자 등 경제·사회 이슈에서 이탈리아 주권을 강조하며 유럽통합에 반감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하지만 에너지 대란과 사상 최고 수준 인플레이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유럽의 공동 대응이 필요한 위기 앞에 이탈리아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리스크가 컸다. 결국 취임 직후 유럽연합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자세를 낮췄다. 자기 말을 뒤집은 셈이지만,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보단 자존심을 조금 구기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물론 이탈리아 집권 세력에 대한 의구심은 걷히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형제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동맹당 소속으로 최근 하원의장으로 선출된 로렌초 폰타나는 대표적인 유럽회의주의자(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다. 또다른 연립정당 전진이탈리아 대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친러시아 발언을 이어가며 유럽연합의 대러 제재에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멜로니가 동료들 발언을 수습하려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우려가 쉽게 불식되지 않는 듯하다. 이 역시 과거에 내뱉었던 말들 때문이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현 대통령 취임 전부터 떠들썩했던 ‘과학방역’이 대표적이다. 새 정부 방역정책을 차별화하려고 정치방역-과학방역의 이분법을 만들어냈지만, 실제로 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단적인 예로 밖에서 벗고 있던 마스크를 식당에 들어갈 때 쓰고, 밥을 먹을 땐 또 벗었다가 계산할 땐 다시 써야 하는 ‘비과학적인’ 상황에 대한 명확한 설명 없이, 방역당국은 “의무화 해제는 시기상조”라는 말만 반복한다. 규제의 공백이 위험의 부재로 인식되는 상황에 섣불리 의무화 조치를 걷어내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이 복잡다단한 의사결정 과정을 정부 스스로 “정치방역”이라는 말 안에 가둬버렸으니 비난을 받아도 하는 수 없다. 공연히 과학방역을 내세워 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소모적인 논쟁에 휘말렸고 방역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정책에 대한 신뢰’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지지 세력을 만족시키려 내뱉은 말이 현실 정책에 해를 끼친 예는 이외에도 무궁무진하다. 잘해봐야 무력하고 못하면 치명적인 게 말이란 생각이 드니, 칼럼을 쓰겠다 나서기가 주저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무력한 말이나마 없으면 변화의 희망을 품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군가 독점해 들리지 않던 말이 발굴돼 공명하면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당장의 호응을 얻는 쉬운 말은 쓰지 않기로 다짐한다. 설령 그 말이 공중에 흩뿌려 사라진다 해도, 적어도 치명적인 덫이 되지는 않아야 할 테니 말이다. 정책연구자로서, 현실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전하는 게 내 몫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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