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의 카이로스]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이 겪는 비참에 괴로워하는 도덕과 청렴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실천에는 치명적인 독이 들어 있었다. 테르미도르 쿠데타 이후 역사는 이 독의 침탈에 맞서 자유를 지킨다면서 부패의 자유, 탐욕의 자유를 뒷문으로 들여오는 반혁명으로 치달았다.
1749년 10월 장-자크 루소(1712~1778)는 <백과전서> 기획자 드니 디드로를 면회하러 갔다. 디드로는 무신론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뱅센의 성탑 감옥에 감금돼 있었다. 뱅센으로 가던 길에 루소는 잡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를 꺼내 읽다가 디종아카데미가 낸 현상공모 논문 주제를 보았다. ‘학문과 예술은 풍속의 타락에 기여했는가 아니면 승화에 기여했는가’. 그 논제를 읽는 순간 머릿속에서 영감의 회오리가 일었다. 루소는 그 경험을 뒷날 후원자 기욤 드 말제르브에게 보낸 편지에 상세히 밝혔다.
“갑자기 수천개의 빛으로 정신이 아득해졌고, 온갖 생생한 생각들이 한꺼번에 맹렬한 기세로 밀려와 저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동요에 빠졌습니다. 머리는 술취한 것처럼 몽롱했고, 세찬 심장 고동에 숨이 막히고 가슴이 벌렁거렸습니다. 더는 걸으면서 숨을 쉴 수 없어 길가의 가로수 밑에 그대로 쓰러져버렸습니다.” 30분 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윗도리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루소는 말을 잇는다. “오, 그 나무 밑에서 제가 보고 느낀 것의 4분의 1만 글로 쓸 수 있었더라면 사회체제의 모든 모순을 명쾌하게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요. 우리 제도의 온갖 남용을 효과적으로 폭로하고,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하며 사람들이 사악해지는 것은 오직 그 제도들 때문이라는 것을 아주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었을 텐데요.”
루소는 이때 본 것을 논문으로 작성해 이듬해 응모했다. 디종아카데미는 루소의 논문을 수상작으로 뽑았다. 밑바닥을 전전하던 무명의 작가에게 명성을 안겨준 <학문예술론>은 그렇게 태어났다. 이 논문에서 루소는 학문과 예술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기는커녕 인간성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했다. 인류사는 불행과 악덕이 번성해온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문명의 진보는 도덕과 풍속의 부패로 얼룩졌다고 진단했다. 루소의 논문은 학문과 예술이야말로 진보의 원천이라고 믿던 당대 계몽주의자들을 정면으로 치받는 글이었다. <학문예술론>은 저자를 논란의 복판으로 들이밀었다. 비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 확신에 찬 의심의 대가는 신념을 거둘 생각이 없었다. 1753년 디종아카데미가 ‘인간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라는 논제로 다시 논문을 공모했다. 루소가 이때 쓴 것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이 글에서 루소는 한층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당대 사회를 비판했다. 인류의 진보가 낳은 것이 사유재산제도인데, 그 사유재산제도야말로 불평등의 뿌리이자 만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자연상태의 미개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불평등이 사회상태의 문명인 사이에서 창궐했다. 루소는 문명이 진보하면 할수록 불평등이 커지고 불평등이 커질수록 사회적 악도 커진다고 단언했다.
주장이 너무 과격했던 걸까. 루소의 논문은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책으로 출간되자 논란의 소용돌이는 더 커졌다. 당대 계몽사상의 우두머리 볼테르는 루소의 책을 두고 ‘읽다 보면 네발로 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고 비꼬았다. 볼테르의 비난은 정당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루소는 논문에서 그런 비난이 나올 것을 알고 미리 이렇게 썼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를 파괴하여 내 것과 네 것의 경계를 없애고 숲으로 들어가 곰들과 함께 살아야 할 것인가? (…) 정념이 원시의 순수성을 영원히 파괴해버린 나와 같은 인간들은 이제는 풀이나 도토리로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루소는 인간과 사회의 자연스러운 진보를 믿지 않았기에 문명의 악폐가 근절된 세상을 만들려면 당대 계몽사상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 처방이 담긴 저작이 1762년 출간된 <사회계약론>이다. 이 저작은 루소의 ‘역사적 비관’이 ‘혁명적 의지’로 전환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루소는 모든 개인이 지닌 공통의 의지를 ‘일반의지’(la volonté générale)라고 명명하고 그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완전하고 절대적인 사회계약을 요구했다.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의 공통 의지이기 때문에 일반의지에 복종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과 같다. 일반의지를 따르는 것은 각자가 자기 자신으로 서는 자유의 행위가 된다. 모든 사람이 함께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음으로써만 참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루소의 믿음이었다. 그런데 만약 개인이 이런 사회계약을 거부한다면, 다시 말해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루소는 “그 개인이 자유로워지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답했다. 일반의지에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실현인데 이 복종을 거부한다면 강제력을 써서라도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루소의 사상에는 기이한 역설이 포함돼 있었다.
이 루소의 사상을 가슴에 품고 프랑스혁명의 급진화를 이끈 사람이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1758~1794)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이 일어나던 1789년 루소를 생각하며 이렇게 썼다. “전대미문의 혁명이 우리 앞에 펼쳐놓은 위험한 길 위에서 내가 당신의 글에서 끌어올린 영감에 변함없이 충실할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부패할 줄 모르고 타협할 줄 모르는 혁명의 청교도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재산도 없이 목수의 하숙집에 살았다. 로베스피에르의 책상 위에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놓여 있었다.
로베스피에르에게 혁명은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어 자유와 평등의 공화국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혁명이 위기에 처하자 로베스피에르는 공안위원회를 움직여 공포정치로 대응했다. 1794년 2월5일 국민공회 연단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선언했다. “혁명정부는 폭정에 대항하는 자유의 전제정이다.” 자유를 실현하려면 전제를 행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에 따라 로베스피에르의 공안위원회는 극좌파 지도자 에베르를 처형하고 관용파 지도자 당통을 단두대로 보냈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는 추상적인 것이어서 ‘무엇이 일반의지냐, 누가 일반의지를 대변하느냐’ 하는 문제를 낳는다. 로베스피에르는 바로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자코뱅 당원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의지가 일반의지다.” 그러면 자코뱅이 아닌 사람, 더 나아가 로베스피에르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일반의지의 적, 혁명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혁명은 실제로 그렇게 진행됐다.
1794년 6월10일 ‘프레리알 22일의 법’이 국민공회를 통과했다. ‘자유의 전제’의 결정판과도 같은 그 법은 혁명재판소에서 변호인의 변호를 금지했다. “변호인을 허용하는 것은 왕당파와 적에게 연단을 제공하는 일이며 가난한 자를 희생시켜 부자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이유였다. 나아가 배심원들은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도 유죄를 선고할 수 있었다. 또 ‘혁명의 적’이라는 범주를 더 확대해 “여론을 오도하고 인민의 교육을 방해하고 도덕을 타락시키며 공중의 양심을 더럽히려 드는 자들”까지 포함했다. 이 법이 통과됨으로써 공포정치는 대공포정치로 나아갔다. 로베스피에르와 생각이 다른 국민공회 의원들은 언제 잡혀갈지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이 두려움이 공포정치의 몰락을 재촉했다.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7월27일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로 체포돼 ‘프레리알 22일의 법’에 따라 단 하루 만에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자유롭고 평등한 공화국을 세운다는 루소의 사상과 로베스피에르의 실천은 자유가 질식하는 공포의 전제정으로 귀결했다. 그러나 이 비극과 함께 기억할 것은 루소의 사상을 이어받은 로베스피에르가 민중이 겪는 비참에 괴로워하는 도덕과 청렴의 화신과도 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로베스피에르가 꿈꾼 자유의 나라는 왕족과 귀족이 자유롭게 특권을 누리는 부패한 나라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벌레처럼 짓밟히지 않고 인간답게 사는 민중의 공화국이었다. 루소의 사상과 로베스피에르의 실천에는 치명적인 독이 들어 있었다. 테르미도르 쿠데타 이후 역사는 이 독의 침탈에 맞서 자유를 지킨다면서 부패의 자유, 탐욕의 자유를 뒷문으로 들여오는 반혁명으로 치달았다. 지금 이 나라에 출몰하는 자유라는 말에 이런 뒷문의 자유는 없는가. 자유는 부패한 정권이 자기를 변호하는 데 쓰는 알리바이가 아니다. 더구나 그런 자유를 지킨다며 법을 무기로 들여와 제 편할 대로 휘두른다면 그것은 자유를 파괴하는 폭정의 춤이 될 뿐이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michael@hani.co.kr
샤를 모네 그림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프랑스혁명의 급진화를 이끈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 쿠데타로 체포돼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