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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사람을 살릴 능력이 당신에게 있다면

등록 2022-11-24 18:34수정 2022-11-24 20:05

지난 10월29일 밤 10시15분 서울 용산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뒤 골목에서 압사사고가 발생했다. 사진은 30일 새벽 사고 현장 모습.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 10월29일 밤 10시15분 서울 용산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뒤 골목에서 압사사고가 발생했다. 사진은 30일 새벽 사고 현장 모습.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비온 뒤 무지개] 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심폐소생술(CPR) 했다가 범죄자 될 뻔한 사연이라며 인터넷에 몇년 째 공유되는 글이 하나 있다. 물에 빠진 여중생을 살렸더니 그 아버지가 성추행으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하고, 딸의 갈비뼈에 금이 갔으니 상해진단서도 제출하겠다며 합의금까지 요구한다는 내용이다. 소방관 되는 것이 꿈인데 전과자 될까 걱정된다는 안타까운 사연이라 ‘이것 봐라. 여성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면 성범죄자로 몰린다’는 주장의 근거로 한없이 인용되고 있다. 실화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수 없는 익명게시글이라 나 역시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몇시간이나 글을 되짚어 본 다음에야 깨달았다. 아, 이 글 어딘가 이상하다.

글쓴이는 자신을 응급구조학과 재학생이자 응급구조사 1급 자격증 소지자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응급구조사 1급은 응급구조학과를 ‘졸업’해야 응시자격이 생긴다. 글의 시작부터 앞뒤가 안맞다. 백발 양보해 정말 1급 응급구조사라고 치자. 그렇다면 물에 빠져 의식을 잃고 맥박과 호흡도 멈춘 사람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갈비뼈에 금이 가는 일이 생긴다 해도 응급의료법 5조2항에 의해 민형사상 책임이 면제됨을 모를 리 없다. 이미 2008년에 법이 개정됐다고 배웠을 테니 말이다. 그럼 성추행은? 마찬가지다. 글쓴이는 심폐소생술을 하기 전에 먼저 119에 전화부터 했기에 응급조치의 일환임이 객관적으로 분명하다. 게다가 현장에 함께 있던 여중생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그 앞에서 바로 시행했으니 형법의 강제추행죄가 성립할 여지가 없다. 도리어 그 아버지란 작자가 돈을 뜯어낼 요량으로 협박하는 것이 너무 명백해 법의 심판을 받도록 맞대응하기에 충분하다.

이태원 참사 직후에도 직장인 익명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자기 경험이라며 ‘여성에게 심폐소생술 시도했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려 합의금 800만원 물었으니 함부로 CPR하지 말라’는 글이 올라왔다. 사실 여부를 조사하자는 댓글이 달리자 글을 삭제했다. 이 행동 자체가 주작일 가능성을 남겼지만, 동시에 억울한 일을 당할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안하는 게 낫다는 믿음도 남겼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심폐소생술의 ‘기적’은 ‘고소당하면 인생 피곤해짐’으로 대체됐다. 슬픈 일이다.

오랜 프로야구팬이라면 2000년 4월의 비극을 기억할 것이다. 롯데 자이언츠의 임수혁 선수가 경기 도중 심정지로 쓰러졌다. 구급차가 올 때까지 주변의 그 누구도 심폐소생술을 하지 못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임 선수는 맥박과 호흡은 되찾았지만 뇌사상태가 됐다. 이를 계기로 야구장에 의료진과 구급차가 배치됐다. 또 응급처치의 중요성이 사회적으로 환기돼 심폐소생술 교육이 확산하고, 다중이용시설에 심장제세동기 설치도 의무화됐다. 뇌 손상을 막을 ‘4분 이내 심폐소생술’을 일반인이라도 불이익 걱정없이 할 수 있도록 법적 안전망도 마련됐다. 앞서 언급한 응급의료법 ‘선의의 응급의료에 대한 면책’ 조항이다. 이를 더 강화하는 논의도 현재 진행 중이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속담이 있다. 적반하장과 배은망덕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생겨난 속담일 것이다. 조상님들은 물에 빠진 사람을 보더라도 절대 구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려한 걸까?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엔 어이없지만 이런 사람도 있다고, 그러니 놀라진 말라고, 설사 그렇다 해도 사람의 생명은 휠씬 더 소중하니 구하려 애써야 한다고 강조하는 말 아닐까? 뉴스를 검색하면 길거리, 식당, 기차 등 일상 공간에서 초등학생, 편의점 알바생, 승무원, 간호사 등 평범한 사람이 낯선 이들을 살린 사례는 예상보다 많다. 성별 가릴 것 없이 사람을 살리려고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고 말한다. 심폐소생술을 모두가 할 줄 알고, 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특정 성별만 겨냥해 ‘하지 말라’ 말이 근사한 조언처럼 떠도는 사회는 아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을 살릴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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