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해방물결과 비건클럽이 8월27일 낮 서울 용산 이태원에서 ‘2022 서울 동물권 행진’을 개최했다. 동물해방물결 제공
전범선ㅣ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지난 5년간 동물권 운동에 몸담아왔다. 동물해방물결의 철학 자문을 맡아 주로 언어를 다듬는 일을 했다.
‘물고기가 아니라 물살이다’라는 칼럼을 썼고,
“살처분이 아니라 대학살”이라고 바로잡았다. 동물권과 동물해방, 종차별과 종평등, 채식주의와 육식주의 등의 언어가 여의도에서 통용되길 바랐다. 비거니즘이 엠제트(MZ)세대의 트렌드로 자리잡으며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다. 오는 21일, 동물해방물결은 정의당 장혜영 의원과 함께 국회에서 대담회를 한다. 동물권은 더 이상 극단적인 소수의 취향이 아니다. 엄연한 정치의제가 됐다.
그런데 답답하다.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느낀다. 동물의 권리를 아무리 외쳐도 인간의 권리가 우선이다. 소, 돼지, 닭의 생명권보다 인간의 육식 선택권이 먼저다. 동물권 운동은 인간의 특권인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을 비인간 동물에게 확장하려는 시도다. “느끼는 모두에게 자유를!” 사람도 이성적인 인간,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성적인 동물, 고통과 행복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동물권은 인권의 확장인 동시에 부정이다. 포스트휴먼 시대,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는 ‘탈인권’ 사상이다.
여기에 동물권의 모순이 있다. 인권을 넘어서기 위해 권리의 언어를 쓴다. 하지만 비인간 동물은 언어를 쓰지 못한다. 수족관의 돌고래나 실험실의 원숭이는 자신의 권리를 언어로 직접 옹호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인간이 비인간 동물의 이익을 대변한다. 결국 인간이 다른 인간을 설득하는 운동이다. 실제로 동물권 운동가가 쓰는 언어는 권리보다 의무가 많다. “동물을 죽이면 안 된다.” “채식을 해야 한다.” 동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무를 규정할 수밖에 없다.
기후운동도 마찬가지다. “탄소를 배출하면 안 된다.” “지구를 살려야 한다.” 비인간 존재를 고려하면 반드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한다. 삼림을 파괴하고 해양을 오염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인간의 권리를 제한해야 자연을 보호한다. 전 인류가 한국인처럼 소비하려면 지구가 3개 필요하다. 이미 지구는 인간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었다. 권리에 따르는 합당한 의무를 부과할 때다.
동물, 기후, 생태, 녹색 운동의 언어를 바꿔야 한다. 권리의 무한한 확장으로는 지속가능성을 꾀할 수 없다. 무한 성장주의를 내건 산업문명의 폭주를 막으려면 권리의 언어로는 필패다. 인권을 넘어서려면 인의(人義), 인간의 의무를 논해야 한다.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 포스트휴머니즘은 성장 대신 성숙을 필요로 한다. 동물권, 생명권, 자연권 운동은 탈인간중심주의로서 인의를 내세워야 승리한다.
시간이 없다. 기후위기의 티핑포인트가 머지않다. 서구 근대문명은 권리장전과 인권선언으로 출발했다.
권리란 본질적으로 요구다. 달라고 떼쓰는 것이다. 억압된 봉건사회에서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과잉된 풍요사회다. 그만 떼쓰고 책임질 때다. 의무란 본질적으로 봉사다. 나뿐만 아니라 남의 안위를 챙기는 일이다. 탈인간, 탈성장을 인의, 성숙으로 고쳐 쓰자. 탈근대 사회는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라는 한집에 사는 모든 식구를 돌본다. 만물의 영장, 지구의 가장을 자처하는 인류가 책임을 다한다.
의무장전(Bill of Duties), 세계 인의 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Duties)을 준비하자. 인권은 익숙한데 인의는 어색한 것이 인류의 문제다. 인류세를 살아남으려면 인의를 보장하는 지구법이 요청된다. 동방예의지국, 한반도의 역할을 기대한다. 인권이 서양의 발명이라면 인의는 동양의 전통이다. 도덕이 곧 인의다. 도와 덕을 기초로 지속가능한 신문명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