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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윤 대통령의 ‘기승전 산업’ 타령이 위험한 이유 [아침햇발]

등록 2023-01-15 14:48수정 2023-01-16 02:46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새해 업무보고를 들으며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새해 업무보고를 들으며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환경부의 새해 업무보고 보도자료 제목은 이랬다. ‘녹색산업, 2023년 20조원, 임기 동안 100조원 수출.’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환경부 업무보고에 웬 수출? 한화진 환경부 장관은 업무보고를 하루 앞둔 지난 2일 기자 브리핑에서는 “장·차관이 환경 세일즈 외교에 직접 나서겠다”고 말했다.

환경부가 팔자에 없는 ‘수출 역군’ 노릇을 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생중계로 진행한 제1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산업 증진과 수출 촉진을 위해 우리 모두가 다 같이 뛴다는 자세로 일해달라”며, 국방부는 방위산업부, 보건복지부는 사회서비스산업부, 국토교통부는 인프라건설사업부가 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모든 부처의 산업부화’라는 ‘교시’를 내린 것이다.

가진 자원도 빈약한 나라에서 대통령이 산업과 수출을 강조하는 걸 뭐라 할 수는 없다. 관련 부처에 팔 걷어붙이고 나서라고 채근하는 것도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산업·수출 드라이브’가 공공성을 우선시해야 할 영역으로까지 향한다면 그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사회 부처는 업무의 성격상 공공성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한다. ‘시장’을 중시하는 경제 부처와는 달라야 한다. 정책 추진을 두고 사회 부처와 경제 부처 사이에 적절한 견제와 균형도 필요하다. 서비스산업 발전이 필요하다고 해서 영리병원이나 영리학교를 마구 허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위해 노동권과 환경권이 쉽게 훼손되어서도 안 된다.

‘제왕적 권력’을 지닌 대통령이 ‘시장’만 바라보며 외곬으로 치닫는다면 정책의 균형은 무너지기 십상이다. 대통령의 메시지는 관료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장·차관 등 고위 공무원들은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며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시도 때도 없이 ‘산업 육성’을 부르짖는 마당에 공공성이나 생명, 안전 따위를 입에 올릴 간 큰 공무원이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윤 대통령이 각 부처의 올해 업무보고 과정에서 내놓은 발언들은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윤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복지를 돈을 쓰는 문제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민간과 기업을 끌어들여 준시장적으로 어떻게 잘 관리할지 생각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돌봄 서비스를 예로 들며 한 말이다. 사회서비스를 산업화해서 성장의 견인차로 활용하자고도 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복지 영역마저 시장 논리로 해결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다. 민영화가 취약계층 복지 축소와 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지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지금도 노인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양기관 중 99% 이상이 민간 시설이라는 걸 윤 대통령은 알기나 할까?

환경부 업무보고에선 환경 규제가 기업의 발목을 잡아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반도체나 바이오 같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분야에 대한 규제를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합리화해달라”거나 “원전 생태계가 속도감 있게 복원될 수 있도록 산자부와 잘 협력해달라”는 언급이 대표적이다. 환경영향평가도 과학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말이 ‘합리화’, ‘과학’이지, 산업 육성의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없애라는 지시나 마찬가지다. 부처 이름에 ‘안전’이라는 말이 포함된 식품의약품안전처에도 “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규제들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했으니 말해 무엇하랴.

‘백년지대계’인 교육도 예외일 수 없었다. 윤 대통령은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교육을 통해 사회의 성장 잠재력을 키우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의 다양성”이라며 “교육을 하나의 서비스로 보고, 수요자와 공급자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독점 시장의 폐해를 언급하며, 교육도 “상당한 경쟁시장 구도”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시장만능주의 교육개혁론에 가깝다. “디지털 인재를 양산해서 산업계에 공급해야 하는 책임”을 거듭 거론한 것도 구시대적이긴 마찬가지다. 21세기의 5분의 1이 지났는데도, 윤 대통령의 교육관은 1960~70년대 산업화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고용노동부 업무보고에서는 “경제가 성장하고 기업이 번창하면 자연히 국민의 실질 임금이 올라가는 것이지, 투쟁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노조’ 정서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우리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이 다 우리 노동자를 위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한때 신자유주의의 첨병 노릇을 하던 국제통화기금(IMF)마저 진작 폐기한 ‘낙수 효과’를 여전히 신봉하는 듯하다.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인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좋은 임금의 유노조 일자리 창출’에 힘을 쏟는 등 뉴딜 이후 가장 친노조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윤 대통령이 새해 업무보고를 통해 각 부처에 각인시킨 메시지는 분명하다. “정부는 오로지 산업 육성을 위해 존재한다.” 아마도 윤석열 정부 내내 공무원들은 영역을 가리지 않고 산업 진흥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찾느라 눈에 불을 켤 것 같다. 그러는 사이 공공성이나 형평성 같은 소중한 가치들은 ‘적폐’ 취급이나 받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이종규 논설위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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