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열정적인 지정학‘들’

등록 2023-02-12 18:34수정 2023-02-13 02:36

해양 문명에 맞서 대륙 문명을 지키기 위한 ‘유라시아주의’를 주창해온 러시아의 정치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 위키미디어 코먼스
해양 문명에 맞서 대륙 문명을 지키기 위한 ‘유라시아주의’를 주창해온 러시아의 정치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 위키미디어 코먼스

[한겨레 프리즘] 최원형 | 책지성팀장

미국의 저명한 러시아문화사가 제임스 빌링턴(1929~2018)은 2004년 저작 <러시아 정체성>에서 소비에트연방 해체 뒤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새로운 정체성 찾기가 어떤 방향으로 펼쳐졌는지 연구한 바 있다. 그는 그중 “권위주의적 대안”이라 부를 수 있는 ‘유라시아주의’에 한장을 할애했는데, 그 핵심을 “열정적인 지정학”이란 말로 표현했다.

고전적인 지정학은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강대국 사이의 쟁투가 현실에서 가장 결정력 있는 행위이며, 객관적인 조건으로 지리가 그 행위에 심대한 영향을 준다고 본다. 유라시아주의는 애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망명가들 사이에서 나타났지만,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에서 “지정학적 위기감과 함께 다시 등장해 재무장된 이데올로기”이다. 당시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전체 세계가 그랬듯 초기 유라시아주의 역시 지정학에 뿌리를 뒀다. 다만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 둘 다로부터 스스로를 굳게 지키며 그 사이에서 다양한 이익을 거둬들여야 한다’ 정도의 내용으로, 철학적인 성격이 더 짙었다. 그러나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에서 부활한 유라시아주의는 그보다 훨씬 ‘열정적’인 지정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빌링턴의 풀이다.

그 배경에는 ‘서구’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이 있다.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유라시아주의의 부활은 대부분 제국 상실에 대한 분노와 새로운 서구지향적 시선을 지닌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의 ‘러시아공포증’에 대한 혐오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소련 해체 과정에서 고르바초프가 주장했던 ‘유럽 공동의 집’에 러시아를 위한 방은 결국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과거 소련의 위성국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러시아 제국이었던 지역으로까지 확장하고 있었다. 이런 위기감 아래, 유라시아 대륙을 비장의 카드로 삼으면 ‘세계화’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지정학적 전망이 러시아 일부 엘리트들 사이에서 새롭고 매력적인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진 알렉산드르 두긴(61)은 그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꼽힌다. 대표작 <지정학의 기초>(1997) 등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이론을 일관되게 떠받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정학 그 자체다. 그는 ‘범대서양주의’로 밀고 들어오는 미국과 해양세력을 막아내기 위해 대륙세력에 속하는 여러 민족과 인종 집단이 힘을 합쳐 “강력한 유라시아 지정학 블록”을 형성할 것을 요구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온 세계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로 물들이려 유라시아 대륙을 체스판처럼 펼쳐놓고 이러저러한 ‘경략’을 구사하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체스판의 반대편에 앉아 체스판을 함께 내려다보겠다는 ‘큰 그림’을 제시한 것이다.

고전적인 지정학은 지리적 조건을 객관적 근거로 삼아 국가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마치 중립적인 지식처럼 도출해냈지만, 1980년대 이후 제기된 ‘비판정치학’은 그것이 결국 특정 시점을 지닌 주체가 자신의 목적(우리와 타자를 구분하는 이데올로기의 전파)을 관철하기 위해 동원하는 문화적 담론이라 지적한 바 있다. “지정학은 특정한 정치집단이 어떻게 그들의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하는가, 혹은 어떤 문화적·역사적 토양이 이러한 전략을 유효하게 만드는가 연구하는 학문이다.”(지상현, 콜린 플린트의 ‘지정학의 재발견과 비판적 재구성’) 그리고 그런 시점을 지닐 수 있던 주체는 언제나 백인·남성·엘리트, 그리고 그들의 총화인 국가였다.

이른바 ‘신냉전’ 시대를 맞아 이상주의의 무지몽매를 꾸짖고 냉정한 현실주의에 입각한 진리가 무엇인지 설파하는 다양한 지정학적 분석들이 여기저기서 끓어오른다. 저 열정적인 지정학‘들’이 저마다 누구의 시점으로 무엇을 추구하는 담론적 실천인지 비판적인 물음에 부쳐보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 없이 공허한 거대 서사들만 남게 될지 모른다.

circl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김 여사 공천개입,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9월20일 뉴스뷰리핑] 1.

김 여사 공천개입,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9월20일 뉴스뷰리핑]

[사설] 계속되는 김 여사 공천 개입설, 사실관계 분명히 밝혀야 2.

[사설] 계속되는 김 여사 공천 개입설, 사실관계 분명히 밝혀야

우리 엄마가 ‘백종원’으로 변했어요~ 3.

우리 엄마가 ‘백종원’으로 변했어요~

AI 교과서가 혁신이라고요? [슬기로운 기자생활] 4.

AI 교과서가 혁신이라고요? [슬기로운 기자생활]

‘베이징 비키니’와 3단 폴더블폰 [특파원 칼럼] 5.

‘베이징 비키니’와 3단 폴더블폰 [특파원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