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이름은 나미비아 민족독립투쟁의 시조이자 현 집권당을 만든 독립영웅의 이름을 따랐다. (…) 나랏일 하는 높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자그마한 공항은 금세 마비가 된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 독립투쟁의 주역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새까만 차들이 활주로 안으로 달려왔고, 그 뒤로 울긋불긋 차려입은 시민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뒤따랐다.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나미비아는 아프리카 남서쪽에 있는 나라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아프리카 대륙이 시퍼렇게 달려오는 바다와 만나는 곳에 있다. 땅은 넓으나 사람은 적다. 한국보다 8배 넓은 땅에 사는 사람은 300만이 채 되지 않는다. 나라 이름조차 ‘넓은 곳’이라는 뜻을 가졌다.
수도는 빈트후크다. 마치 지도를 펴고 동서남북을 꼼꼼히 재어본 뒤에 한가운데 점을 콕 찍어 정한 것처럼, 나미비아의 정중앙에 있다. 빈트후크라는 이름에는 독일어의 흔적이 진하게 배어 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독일제국 식민의 역사는 지금도 도시 곳곳에서 당당하다. 거리 이름은 ‘스트라세’(독일어로 ‘거리’)로 끝나고, 빈트후크의 언덕 위에 있는 고급주택가는 ‘클라인(독일어로 ‘작은’) 빈트후크’라 불린다. 작은 지역이지만 알짜배기다. 소수의 힘센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저 밖을 내려다보고 널리 지배하는 곳이다.
밤새 날아온 비행기는 따스한 아침 공기를 뚫고 공항에 도착했다. 옅은 안개에 덮여 더욱 한적해진 공항 이름은 나미비아 민족독립투쟁의 시조이자 현 집권당을 만든 독립영웅의 이름을 따랐다. 1990년에 독립했을 때 나미비아는 서둘러 공항 이름부터 바꿨다. 그래서인지, 나랏일 하는 높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자그마한 공항은 금세 마비가 된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 독립투쟁의 주역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새까만 차들이 활주로 안으로 달려왔고, 그 뒤로 울긋불긋 차려입은 시민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뒤따랐다. 옆으로는 자동차보다 더 까만 양복을 입은 수십명이 도열했다. 막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은 그 ‘화려한 출발’에 떠밀려 활주로 옆길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외국 관광객들은 신기한 듯 사진을 찍었고, 나미비아 승객들은 투덜거렸다. “정의로운 기억을 가진 자들이 매일 길을 막고 선다”는 알 듯 모를 듯 한 말을 했다.
서둘러 빈트후크로 달렸다. 첫 약속부터 지각이었다. 운전사는 나보다 더 걱정했던 터라, 마음이 앞서고 차는 뒤따랐다. 쉴 새 없이 농장들이 시원하게 줄지어 지나갔다. 나는 다시 산술적인 고민으로 돌아왔다. 저렇게 넓디넓은 땅에 정작 사람들이 일할 땅이 없고 실업률이 30%에 육박하는 현실을 숫자로 설명하긴 쉽지 않다. 게다가, 엄청난 천연자원 덕분에 나미비아의 1인당 평균소득은 높은 편이다. 우라늄 생산은 세계 4위고, 다이아몬드 생산량도 괄목상대다. 하지만 평균소득만큼 불평등도 높아서 나미비아는 현재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다.
노조, 경영자단체, 그리고 시민단체를 먼저 만났다. 일자리와 노동소득 문제에 관한 의견을 차분히 듣고자 만든 자리였는데, 회의는 시작부터 뜨거웠다. 일자리고 뭐고 간에 부정부패부터 척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 선 공기처럼 팽팽하게 퍼졌다.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데 일자리 정책은 무슨 소리냐는 말도 나왔다. 그리고 내 얼굴을 또렷이 보며, 당신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따지듯이 물었다. 정부를 설득하라고 쏘아붙였다.
나는 얼굴을 붉힌 채 서둘러 정부 건물로 갔다. 높은 분들과의 약속이 줄줄이 잡혀 있었다. 해방독립투쟁의 영웅들이 그려진 대형 그림이 내려다보이는 장소 때문인지, 그들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원대한 꿈이 넘쳤다. 시간을 다투는 짧은 만남에서도 그들은 틈틈이 해방투쟁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프리카 대륙을 기약 없이 떠돌고, 모스크바와 아바나(하바나)에서 공부했던 기억. 경제는 제법 괜찮은데 서민의 삶은 왜 계속 어렵냐는 물음에 그들은 바로 “불공정한 세계 질서”를 들고나왔다. 제국주의적 행패 때문에 나미비아 광물이 제값을 못 받고, 국제금융체제는 나미비아 같은 약소국으로부터 여전히 돈을 빼앗아 간다고 했다. 물론 그런 면이 있지만 지금 당면한 시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책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물음에, 이런 국제관행부터 고치지 못하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선언이 되돌아왔다. 그들은 아직 ‘해방투쟁’ 중이었다.
뜨겁게 겉도는 말에 지쳤다. 나는 운전사에게 빈트후크 외곽에 있는 ‘비공식 정착촌’으로 가자고 부탁했다. 나미비아 곳곳에서 떠밀려 온 사람들이 대규모로 모여 사는 곳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판자촌인데, 여기 집들은 대부분 양철을 재료로 삼는다. 말하자면 ‘양철촌’이다. 정부 공무원인 운전사도 거기서 산다고 했다. 벌써 20년째란다.
빈트후크를 떠나면서 눈에 들어온 것은 현 집권당 중앙당사였다. 10층 정도 되는,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이 건물도 ‘정의로운 기억’으로 장식돼 있었다. 독립투쟁이 정당이 되고 그 정당이 30년째 집권하며 정부가 됐다.
이 눈부신 건물을 돌아서자마자 ‘양철촌’이 시작됐다. 끝이 없었다. 차로 30분을 돌아다녔는데도, 그 일부만 볼 수 있었다. 서너평 남짓한 공간에 나무나 벽돌로 기둥을 세우고 양철로 덮었다. 대부분 전기와 수도가 없다. 늘 건조한 나미비아에 비는 희소식이지만, 이곳에서는 비 소식은 걱정거리다. 비만 오면 침수다.
붉은 흙가루 날리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쳤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인구조사는 10년 전에 했다. 정부 재정이 부족해 새로운 조사를 하지 못했다.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일자리가 걱정이라는 정부는 정작 현재 실업자가 몇명인지 모른다. ‘양철촌’에도 그저 수십만명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나마 학교와 병원은 있다. 일찍이 러시아와 쿠바가 도왔고, 이후로는 중국이 도왔다. 그래서 어떤 지역은 하바나로 불리고, 제일 규모 있는 학교 이름은 마오쩌둥(모택동) 학교다. 양철촌에 나미비아 정부는 보이지 않고, 외국 정부의 낯선 손길만 있다.
늦은 오후 햇살에 양철지붕이 빛날 때 빈트후크로 돌아왔다. 여전히 굳건한 중앙당사를 끼고 ‘양철촌’을 등지고 돌아서는 길옆으로는 다시 농장들이 보였다. 운전사는 저 멀리 이쪽저쪽을 가리키며, 저기에 어느 장관의 농장이 있고 그 옆 어디로는 어느 장관의 농장이 있다고 했다. 농장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그들은 금요일 오후에 길을 나선다고 한다. 그래서 금요일 오후에는 회의가 없을 거라고 귀띔해줬다. 나는 그 장관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해냈다. 그들을 만나 빈곤과 불평등에 관해 자못 진지하게 논쟁을 벌였으나, 그들의 대답은 지금도 끝나지 않은 ‘정의의 옛 기억’이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양철판처럼 타오르는 바깥의 고통에 대해 둔감했다.
운전사는 숙소 앞에 나를 내려주고, 걸어서 ‘양철촌’의 집으로 갔다. 빨리 걸으면 한시간 만에 갈 수 있다면서 활짝 웃었다. 해가 곧 지고, 비가 잠시 내렸다. 빈트후크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