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퐁니 학살’의 생존자 응우옌티탄(가운데 왼쪽)과 응우옌득쩌이가 지난 12일 베트남 다낭의 집에서 한국 법원 판결에 관한 축하 꽃다발을 건네받으며 기뻐하고 있다. 다낭(베트남)/신다은 <한겨레 21> 기자
박찬수 | 대기자
“그날 오전 퐁니촌 응우옌티탄(8)의 집에는 오빠(15), 언니(11), 남동생(6), 이모 판티응우(32), 사촌 동생(생후 8개월), 동네 오빠(13)가 같이 있었다. 총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이모와 응우옌티탄을 비롯한 7명은 겁을 먹고 동굴로 숨었다. 미군 폭격에 대비해 파놓은 깊이 1m, 폭 4m의 작은 공간이었다. 집에 들이닥친 한국 군인은 동굴을 발견하고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모는 나가지 말라고 했다. 한국 군인은 수류탄을 던지는 시늉을 했다. 아이들은 무서움을 견딜 수 없었다. … 지우고 싶은 시간이 흘렀다. 응우옌티탄은 배에 총을 맞고도 날쌔게 다른 집으로 도망쳤다. 배와 엉덩이에 총을 맞고 아예 일어서지 못하는 오빠만이 옆에 있었다. 나중에 미군과 남베트남민병대에 발견돼 오빠와 함께 헬리콥터로 후송됐다. 그날 집에 있던 7명 중 5명이 죽었다.”(<베트남전쟁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퐁녓 학살 그리고 세계>(고경태 저)에 실린 응우옌티탄의 증언)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은 이제야 비로소 약간의 위로를 받았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은 베트남전 파병 한국군의 퐁니 학살을 인정하고 한국 정부가 응우옌티탄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베트남전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을 바꾸기 시작한 게 1970년대 중반이었다. 베트남 국민에 대한 폭력과 가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데엔 반세기가 더 걸린 셈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법원 판결을 곧바로 부정했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17일 국회 국방위에서 “여러 가지 자료를 확인하고 증인도 확인해봤는데, 우리 장병들에 의한 학살은 전혀 없었다. 파월장병의 명예를 생각해서도 이 부분을 엄중하게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 장관의 국회 답변은 용산 대통령실과 면밀하게 조율한 것일 터이다. 1960년대 베트남전 확전을 주도했던 로버트 맥나마라 전 미국 국방부 장관은 훗날 회고록에서 “완전히 잘못했다. 후대에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다”고 토로했다. 물론 베트남전은 ’미국의 전쟁’이지 ’한국의 전쟁’은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가장 잘못된 전쟁의 가장 잔혹한 장면 중 하나를, 21세기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이 여전히 외면하며 ‘잘못한 게 없다’고 강변하는 게 온당한 일인가. 이런 장관 답변을 용인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와 인권’은 무슨 의미와 가치를 지닌 것일까.
윤석열 정부는 “전쟁 당사자인 미국도 베트남인들에게 공식 사과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물며 미국의 요청으로 참전했던 우리가 사과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다. 최소한 58만명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을 숨지게 하고 남베트남 면적의 12%에 고엽제 등 화학약품을 뿌린 미국에 비하면, 퐁니 학살은 ’극한의 전쟁 상황에서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사소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도 미국 국방부는 1970년대 초 베트남 미군의 고의적인 민간인 학살과 잔혹행위를 나름 철저하게 조사했고, 9천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남겼다. 기밀로 분류됐던 보고서는 30년이 지난 2006년에야 공개됐다.
가장 끔찍했던 미라이 대학살을 제외하고, 최소 137명의 민간인이 숨진 7건의 학살 등 수백건의 미군 잔혹행위가 보고서엔 기록돼 있다. 반면 퐁니 학살에 대해선 한국 정부의 제대로 된 조사보고서가 있는지조차 분명하게 확인된 적이 없다. 학살 이듬해인 1969년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현장에 있던 장교·하사관들을 남산으로 불러 조사를 했다는데, 그 내용은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그 점에서 응우옌티탄의 아픔은 역대 진보·보수 정부가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
차이는 있다. 베트남 국민들에게 정식 사과는 아니지만 ’유감 표명’이라도 한 역대 대통령은 세명, 바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이다. 김 대통령은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줘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고, 노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만약 윤석열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한다면 베트남 국민들에게 어떤 얘기를 할까. 이종섭 장관 발언에 비춰보면 아예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게 거의 확실하다.
응우옌티탄이 받게 될 배상금은 3000만100원, 국가배상소송 최소액인 3000만원에 100원을 더한 액수다. 그는 판결 직후 “돈에는 관심이 없다. 한국 정부의 인정과 사과를 받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가족을 잃고 간신히 살아난 8살짜리 꼬마는 반세기의 고통에도 “사과를 원할 뿐 돈은 필요없다”고 말하는데, 여전히 ‘파월장병 명예’만 강조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보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