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한국여성단체연합이 4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연 제38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성평등을 지지하는 각국 외교관들이 무대에 올라 인사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이종규 ㅣ논설위원
지난달 말, ‘3·8 세계 여성의 날’ 행사를 알리는 여성단체의 보도자료를 훑어보다 ‘성평등 걸림돌 발표’라는 대목에서 눈길이 멈췄다. 얄궂게도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떠올랐다. 혹시?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김 장관은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과 나란히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선정한 ‘올해의 성평등 걸림돌’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언필칭 ‘성평등 컨트롤타워’의 수장이 성평등 걸림돌이라니. 전무후무한 일로 남을 듯싶다.
권성동 의원이 누구인가. 여가부 폐지 법안을 발의하고 ‘성별 갈라치기’를 정략적으로 이용해온 정치인이다. 이런 정치인과 같은 반열에 오른다는 건 여가부 장관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김 장관이 그럴 것 같진 않다. 여성 이슈에 관한 한, 두 사람이 환상의 ‘케미’를 선보인 바 있어서다.
지난해 6월, 당시 여당 원내대표이던 권 의원은 취임 인사차 국회를 찾은 김 장관에게 “여가부는 그동안 성과는 없고 예산만 축내는 부처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돌직구를 날렸다. 최소한의 체면치레조차 찾아볼 수 없는, 모멸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 장관은 “여가부 폐지에 공감한다”며 “말씀을 유념하겠다”고 화답했다. 7월에는 권 의원의 전화 한 통으로 멀쩡하게 진행되던 성평등 문화 사업이 좌초되는 일도 벌어졌다. 장관이 이렇게까지 영혼이 없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할 때 여가부 장관에 누가 임명될지 무척 궁금했다. 대통령 당선자가 선거 기간 내내 “여가부는 역사적 소명이 다했다”며 폐지를 공언한 마당이니, 말이 좋아 장관이지 결국 부처 문을 닫고 나오는 역할을 해야 할 운명임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장관을 맡겠다고 할 사람이 있기나 할까 싶었다. 한편으론, 그래도 장관인데 자기 부처를 없애는 일에 선뜻 동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윤석열 대통령에게 김 장관 낙점은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시종일관 여가부 폐지를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으로 여기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인사청문회에서조차 여가부 폐지 ‘소신’을 밝혔다가, 야당 의원들한테서 ‘부처 폐지에 동의하면서 그 자리에 왜 있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여가부 폐지에 찬성하는 여가부 장관의 인사청문회, 부조리극이 따로 없다.
김 장관이 ‘여가부를 폐지해야 성평등 체계가 오히려 강화된다’ ‘여가부가 폐지된다면 상당히 중요한 일을 한 장관으로 평가될 것이다’ 등의 주옥같은 말을 남기며 ‘반여성’ 드라이브에 적극 ‘부역’하는 사이, 성평등 정책은 역주행을 거듭했다. 정책 영역에서 ‘여성’ ‘성평등’이라는 용어가 하나둘씩 지워져갔다. 지방정부의 성평등 추진체계 약화는 불문가지다.
존폐의 기로에 선 부처가 제 목소리를 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건강가정기본법 개정(혼인·혈연 중심의 가족제도 개선)에 대한 여성부의 입장이 찬성에서 반대로 뒤집혔다. 5년 단위의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에 포함돼 있던 ‘비동의 강간죄’ 도입 추진은 법무부와 여당의 반대에 9시간 만에 철회됐다. 김 장관은 인하대 성폭력 사망 사건을 두고는 ‘학생 안전의 문제지, 여성 폭력이 아니다’라고 했다가 뭇매를 맞기도 했다.
지난 4일 여성단체들이 여성의 날을 기념해 연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은 ‘퇴행의 시대를 넘는 거센 연대의 파도가 되어 성평등을 향해 전진하자’고 다짐했다. 김 장관이 성평등 걸림돌로 호명된 것도 그 자리에서였다. 그러나 여성들이 왜 ‘퇴행’을 걱정하는지 김 장관은 여전히 모르는 것 같다. 그는 지난달 야당의 반대로 ‘여가부 폐지’가 빠진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한 뒤 국회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전히 여가부의 조직 개편을 하는 것이 국민에게 더 나은 여성·가족·청소년 서비스를 제공하는 길이라고 보는데, 국회 논의 과정에서 불발되었고….”
여가부 폐지가 국회에서 막힌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하기야 구조적 성차별의 증거들이 차고 넘치는데도, ‘한국에 구조적 성차별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여가부 장관에게 뭘 기대하랴.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성별 임금 격차, 기업체 여성 임원 비율 등을 조사해 여성의 날 즈음에 발표하는 ‘유리천장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올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꼴찌를 기록했다. 벌써 11년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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