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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의 세 가지 고민

등록 2023-04-02 18:45수정 2023-04-03 02:05

한겨레 열린편집위원회 회의가 3월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겨레 열린편집위원회 회의가 3월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시민편집인의 눈] 이승윤 |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이른 아침부터 공장에서 일하지만 밤에는 또 다른 공장으로 출근하는 아버지. 새벽 4시부터 청소와 빨래 일을 하는 어머니. 무자비한 노동으로 부모의 하루가 채워지는 사이, 같은 시공간에서 아들은 노동계급에 관한 책을 읽으며 저 멀리 혁명 이후의 세계를 꿈꾼다. 어느 날, 아버지는 <르몽드>를 읽던 아들을 향해 버럭 화를 낸 뒤 방을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아들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사르트르의 소설을 집어 들더니 입술을 삐죽인다.

프랑스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의 회고록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노동과 계급,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성소수자성 등 그를 둘러싼 ‘구획’들에 대한 반문의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다.

지난 일년간 <한겨레> 시민편집인 겸 열린편집위원장으로서 짧게나마 한겨레의 저널리즘 여정을 함께했다. 10기 열린편집위를 마무리하면서 한겨레가 마주한 고민은 깊은 여운으로 남았기에, 그 일부를 나눠보고자 한다.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으로 1988년 창간된 한겨레는 이제 7만 주주를 가진 우리 사회 주요한 언론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한겨레가 35년 역사를 쌓아오는 동안 한겨레 주주와 독자, 노동계급, 그리고 시민사회도 변화하고 분화했다. 여기서 한겨레의 첫번째 고민이 시작된다. 에리봉의 부모처럼 여전히 고된 노동의 일상을 사는 노동자도 한겨레 독자지만, 한발짝 먼 시공간의 가치를 가슴에 품었던 에리봉 같은 이들도 한겨레의 열렬한 독자이다. 정의로운 민주주의의 원리와 선명한 정치적 이념이 중요한 독자도 있지만, 동네와 이웃, 일터에서의 소소하고도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공감해주길 원하는 오래된(또는 예비) 독자도 있다.

여기에 더해, 페미니즘, 생태주의, 기후위기, 소수자 인권 같은 새로운 의제를 통해 우리 사회의 전진을 고민하는 집단도 한겨레의 독자층이다. 세 집단이 하나의 진보적 가치로 연대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이때 정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질문이다. ‘한겨레의 독자는 누구인가’보다, ‘한겨레의 독자는 누구이어야 할까’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두번째 고민은 한겨레의 주류화가 가져온 양면이다. 시민들의 십시일반으로 시작된 한겨레는 한국 사회 비주류였다. 기득권이 유·무형의 권력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의 보유를 의미한다면, 한겨레는 이제 주류가 됐다. 이를 외면하면서 힘없는 비주류 언론사를 자처해서는 안 된다. 35년 세월을 거쳐오며 한겨레는 우리 사회의 주요 담론을 생산하고 정책화하는 경험과 역량을 쌓아오지 않았나. 문제는 ‘주류가 돼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매력적인 덫은, 소외되고 누락된 이야기를 듣는 감각능력을 약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류화의 유용성과 위험성 사이 어딘가에서 영원한 각성상태로 서 있어야 하는 운명이다.

마지막으로 한겨레는 한국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수리적 집합체보다 훨씬 큰 상징적 조직으로 자리매김해 있다는 점이다. 한겨레가 지향하는 가치를 향해 전진하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판단, 자율성, 젊은 기자들의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쉽다. 커다란 책무와 역할이 요구되는 조직일수록 개별 가치관을 표현하려는 구성원들에게 ‘일단 멈춤’이 요청된다. 언론사로서 한겨레가 지향하는 가치와 개별 기자들의 가치체계, 큰 보폭과 작은 보폭 사이 조율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노동자, 청년, 시민, 그리고 진보활동가의 삶과 가치관이 분화하고 변하고 있다면 이들에 대한 서사도 발맞춰 진화해야 한다. 여기에 젊은 기자들이 취재 현장에서 느끼는 치열한 고민이 담긴 기사는 변화하는 서사를 위한 소중한 한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겨레>의 고민의 여정을 응원하며, 한해 동안 함께 열정을 나눠주신 10기 열린편집위원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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