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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노 대통령 ‘제주4·3’ 뜻밖 사과에 도민들 감동의 도가니”

등록 2023-04-03 19:42수정 2023-04-05 03:54

[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9화-한맺힌 제주4·3

2003년 3월31일

노 대통령이 수석회의에서

‘4·3 추모식’ 참석 여부를 물었다.

유인태 정무수석은 참석을 권했고

김희상 국방보좌관은 반대했다.

10월31일 제주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이 도민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생전에 이런 날이 올 줄…”

뉴스에서 유족들 장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했다.

2006년 4월3일 ‘위령제’

58년 만에 국가 행사 승격

노 대통령은 또한번 공식 사과를 했다.

2003년 10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이 라마다 프라자 제주호텔에서 열린 ‘도민과의 대화’에서 ‘제주4·3학살 사건’에 대해 국가를 대표해 처음으로 사과를 하고 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3년 10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이 라마다 프라자 제주호텔에서 열린 ‘도민과의 대화’에서 ‘제주4·3학살 사건’에 대해 국가를 대표해 처음으로 사과를 하고 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3년 3월31일(월) 오전 9시 노무현 대통령 주재 수석회의에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설립된 제주4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조사위원회)에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다만 사건의 민감성을 고려하여 6개월간의 수정 시한을 두었기 때문에 아직 확정된 보고서는 아니다. 노 대통령이 며칠 뒤 열릴 ‘4·3’ 추모식에 대통령이 참석할지 말지를 물었다. 유인태 정무수석은 참석을 권고했고, 김희상 국방보좌관은 반대했다. 반기문 외교보좌관과 문재인 민정수석은 절충론을 폈다. 즉, 이번에는 참석하지 않되 6개월 뒤 4·3 보고서가 확정되면 내년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하자는 것이다. 절충론이 채택됐다.

2000년 1월11일 김대중(맨 가운데)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서 이희호(앞줄 오른쪽) 여사 등이 배석한 가운데 ‘4·3특별법’에 서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1월11일 김대중(맨 가운데)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서 이희호(앞줄 오른쪽) 여사 등이 배석한 가운데 ‘4·3특별법’에 서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4월3일(목) 오전 8시30분 대통령 주재 수석회의의 좌석 배치가 원래대로 횡으로 돌아왔다(노 대통령의 허리 통증 때문에 좌석 배치가 종으로 바뀌었다가 원상회복. 그러나 얼마 뒤 다시 종으로 바뀌었다). 유인태 수석은 내년 4월3일 제주도 추모식에 대통령이 참석해서 사과할 것을 권유했다. 그 말에 내가 동조하면서 평소 나답지 않게 길게 발언했다(나는 평소 회의에서 발언을 적게, 짧게 하는 편이다). ‘해방 후 혼란기에 민간인의 억울한 죽음이 50만 내지 100만 명이나 되는데 어떤 대통령도 이것을 언급한 적이 없고 교과서에도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 전국이 시체로 뒤덮이고 유족들의 한이 하늘에 사무친다. 4·3은 그 비극의 정점이다. 내년에 제주도에 가서 대통령이 사과를 하되 오늘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날이니 그냥 넘기지 말고 위로의 뜻으로 한 말씀하시기 바란다.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는 사민주의자로서 나치에 반대했고 전쟁에 전혀 책임이 없는 사람이지만 1970년 폴란드의 유대인 위령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했다. 온 세계가 사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사과했다고 평가했는데, 그 사과로 세계인이 감동을 받았다. 그 점에서 독일은 과거를 청산하고 사과한 것으로 인정받았지만 일본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내년에 노 대통령이 4·3에 대해서 공식 사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대충 이런 내용의 발언이었다. 그러자 김희상 국방보좌관이 반대했다. “4·3을 폴란드에 비유함은 천부당만부당하다. 군경의 명예도 걸린 문제이므로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석회의를 마치고 이해성 홍보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의 ‘ 4·3사건’ 위로 말씀이 나가도록 부탁하니 벌써 송경희 청와대 대변인이 언론브리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통령의 위로 말씀이 꼭 나가도록 조처해 달라고 이 수석에게 다시 부탁했다. 나중에 송 대변인에게 물어보니 그 말을 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2003년 4월2일 노무현 대통령이 3년 만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제출한 제주4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고 있다. 앒서 2000년 8월 강만길 민족화합협력범민족위원회 상임의장,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 김점곤 경희대 명예교수, 김정기 서원대 총장, 박재승 변호사, 박창욱 제주4ㆍ3사건 민간인희생자 유족회장,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신용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 이돈명 변호사, 이황우 동국대 경찰학과 교수, 임문철 제주 서문성당 주임신부, 한광덕 전 국방대학원장 등이 민간위원으로 위촉됐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3년 4월2일 노무현 대통령이 3년 만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제출한 제주4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고 있다. 앒서 2000년 8월 강만길 민족화합협력범민족위원회 상임의장,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 김점곤 경희대 명예교수, 김정기 서원대 총장, 박재승 변호사, 박창욱 제주4ㆍ3사건 민간인희생자 유족회장,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신용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 이돈명 변호사, 이황우 동국대 경찰학과 교수, 임문철 제주 서문성당 주임신부, 한광덕 전 국방대학원장 등이 민간위원으로 위촉됐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세월이 반년 흘러, 그해 10월31일(금) 제주도에 내려간 노 대통령이 오찬 연설에서 4·3사건에 대해 제주도민에게 사과했다.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다. 이날 저녁 나는 동북아 학술회의 참석차 방한한 중국·일본의 학자·언론인들과 만났다. 중국인 6명과 일본인 3명이 참석했는데 나는 이들에게 참여정부의 목표와 현실을 설명해준 뒤 질의와 응답 시간을 가졌다. 일본어, 중국어 순차 통역을 하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나는 참여정부의 국정목표인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설명하면서 오늘 제주도에 내려간 대통령이 오찬 연설에서 해방 직후의 4·3사건에 대해 최초로 공식 사과한 것의 의미를 해설해 주었다. 중국인·일본인들은 깊은 관심을 갖고 경청했고, 그밖에 여소야대 정국,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대해서도 질문을 했다.

그날 밤 9시 텔레비전(TV) 뉴스에서 노 대통령이 제주도민 앞에 사과하는 장면을 보았다.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대통령이 갑자기 4·3사건에 대해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정하고 국가를 대표해서 사과를 하자 전혀 예상 못하고 있던 오찬장의 참석자들은 순간 술렁거리고 장내는 온통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깜짝 놀라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뒤쪽에 서있던 아주머니 한 명은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갖다 대며 소감을 묻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생전에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해오며 대통령이 사과하길 참 잘했구나 싶었다.

2006년 4월3일 노무현 대통령이 첫 국가 주최로 열린 ‘제58주기 제주4·3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추도사를 하고 있다.(왼쪽 사진) 이날 위령제에서 다시한번 공식 사과를 한 노 대통령이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6년 4월3일 노무현 대통령이 첫 국가 주최로 열린 ‘제58주기 제주4·3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추도사를 하고 있다.(왼쪽 사진) 이날 위령제에서 다시한번 공식 사과를 한 노 대통령이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노무현사료관 제공
노 대통령은 2년 반 뒤인 2006년 4월3일 ‘제58주기 4·3 위령제’에 참석해서 이렇게 연설했다. “2년 반 전, 저는 4·3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 여러분께 사과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내주신 박수와 눈물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4·3 추모가 국가적 행사로 승격한 것을 전임 김대중 대통령과 제주4·3조사위원회의 공로로 돌렸다.

4·3사건은 1947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시민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시작하여 7년7개월간 계속된 대규모 민중항쟁이다. 그무렵 제주도는 국외에서 귀환한 동포 6만명의 구직난, 콜레라, 극심한 흉년, 생필품 부족과 물가고, 친일경찰의 존속, 미군정 관리들의 부패, 이승만의 욕심에 의한 남한 단독정부 추진 등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민중의 자연발생적인 항의와 요구를 군경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4·3학살’ 와중인 1948년 5월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둘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안재홍(안경 쓴 이) 민정장관,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유해진(맨뒷편) 제주도지사,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오른족 뒷편)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사진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4·3학살’ 와중인 1948년 5월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둘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안재홍(안경 쓴 이) 민정장관,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유해진(맨뒷편) 제주도지사,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오른족 뒷편)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사진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경찰 총수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 상공에서 기름을 붓고 섬을 몽땅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끔찍한 말을 하다니. 그때 진압 책임자 중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려고 한 온건파인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유격대장 김달삼과 담판을 해서 중요한 ‘4·28 합의’를 이뤄 분쟁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대다수 강경파에 둘러싸인 김익렬 중령은 수적 열세였고, 미 군정장관 윌리엄 딘이 주재한 대책회의에서 강경파 조병옥과 대립해 멱살잡이까지 하며 싸운 뒤 해임됐다. 결국은 강경파가 득세하여 앞뒤 가리지 않는 무차별 진압에 나선 결과 최악의 사태로 치달았다. 특히 조병옥이 치외법권적 폭력무뢰배인 서북청년단을 제주도에 투입한 결과, 고립무원의 섬은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는 생지옥이 됐다. 제주도민 30만명 중 최소 3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니 제주도민 중에서 일가친척 희생자가 없는 집이 드물 것이다. ‘80년 5월 광주’도 그랬고 대부분의 민중항쟁이 그렇지만, 얼마든지 대화와 순리로 풀 수 있는 것을 강경파들이 파국으로 몰고 가는 사례가 많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4·3 사건은 내가 배운 역사 교과서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20대 후반쯤 역사책을 읽다가 우연히 미국인 학자 존 메릴이 쓴 ‘제주도의 반란’이라는 논문을 읽고서 이 사건을 처음 알게 됐다. 요즘은 좋은 책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 현대사는 불모지였다. 학교에서 배운 한국사는 늘상 고인돌, 고려 무신정권 하다가 끝나기 일쑤였다. 물론 고대사, 중세사도 중요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중요한 것은 현대사가 아닌가. 현대사는 현재의 나라 모습과 우리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현대사를 이렇게 소홀히 취급하나. 이승만·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워 유독 현대사를 가르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하여튼 반세기나 지각이지만 4·3사건에 대해 노 대통령이 최초로 국가를 대표해서 공식 사과한 것은 참으로 잘 한 일이다. 나는 이런 정부에서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한참 뒤 나는 4·3사건을 소재로 한 대표적 소설 <순이 삼촌>의 작가 현기영 선생을 청와대 행사에서 뵙게 되어 매우 반갑고 영광스러웠다. 4·3은 오랜 세월 금기였고, 이 소설은 독재 시절 탄압 받았던 소설이다. 세상에는 원통한 일이 많지만 그래도 민주화를 통해 우리는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간다.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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