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왼쪽)과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 연합뉴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가끔 연락하는 <한겨레> 기자가 있다. 말을 주제로 기자끼리 토론이 붙나 보더라. 말에 대한 감각이 천차만별이니 토론이 자못 뜨거워 보였다. ‘기자들이 말에 대한 고민이 많군’ 하며 즐거워한다. ‘내기’ 를 거는지는 모르지만, 급기야 생각 없이 사는 나한테까지 질문을 한다. 내 대답은 늘 ‘어정쩡’ 하다. ‘이렇게 볼 수도, 저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며칠 전엔 아트센터나비 관장 노소영씨가 티앤씨(T&C)재단 이사장 김희영씨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김씨를 에스케이(SK) 회장 최태원씨의 ‘내연녀’ 라 할지 ‘혼외 동거인’ 이라 할지로 논쟁이란다.
상식적(?) 으로 보면, ‘내연녀 / 내연남’은 개인의 사생활을 매도하고 편견을 조장하는 말이니 ‘혼외 동거인’ 이라 쓰는 게 맞다고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연락해온 기자는 노소영씨 입장에 주목했다. 노씨가 소송을 한 데에는 두 사람의 내연 관계에서 받은 정신적 상처가 영향을 끼쳤을 텐데, 김씨에게 ‘혼외 동거인’(‘동거녀’ 도 아닌) 이란 중립적인 표현을 쓰는 게 온당한가? 은밀함, 비도덕성, 부적절함 같은 말맛이 풍기는 ‘내연녀’ 란 말을 써야 ‘본처’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담을 수 있지 않겠냐는 마음일 듯. 이렇게 볼 수도, 저렇게 볼 수도 있겠다.
나는 다른 데에 눈길이 갔다. ‘내연녀’ 와 ‘혼외 동거인’ 사이에서 새삼 고민하게 된 계기가 뭘까 하는 것. 유사 이래로 혼외 연애 범죄는 끊임이 없었다. 그걸 다룬 기사는 한결같이 ‘내연녀 / 내연남 고소 / 협박 / 폭행 / 살해’ 였다. 그렇다면 혹시 고결한 재벌가의 연애사를 다루다 보니 비로소 번민이 시작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