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26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뒤쪽)이 윤석열 대통령과 환하게 웃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특파원 칼럼] 이본영 | 워싱턴 특파원
지난해 5월 한-미 정상회담 직후,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언론계 선배가 내게 물었다.
“‘아이 트러스트 유’(I trust you)가 무슨 뜻인 거 같아?”
“뭐긴요, 믿는다, 신뢰한다 그런 말이겠죠.”
“그거보단 ‘말한 대로 하는지 지켜보겠어’라고 해석하는 게 더 맞을걸.”
‘아이 트러스트 유’는 윤석열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떠나면서 건넨 말이다. 다수 국내 언론은 깊은 신뢰의 표현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듣고 보니 동맹국 정상에게 한 작별 인사로는 어색한 것도 같았다.
1년 가까이 흘러, 지난달 26일 나온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읽으면서 선배의 해석이 그럴싸했음을 깨달았다. 공동성명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환영” “지지” “평가”했다는 대목이 쭉 이어진다. 칭찬 자체는 나쁠 게 없다. 그런데 이런 평가 대상은 한국의 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 개최, 아시아·태평양 안보 역할 확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협력, 한국판 인도·태평양 전략, 한-일 관계 개선과 군사협력 등이다. 미국이 한국에 바라고 종용해온 것들이다. 윤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을 평가한 대목은 별로 없다.
결국 공동성명은 한국의 행동이 미국의 세계 전략에 얼마나 부합하는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이 1년 전 표현한 신뢰에 충실히 부응했다. 그런 면에서 공동성명은 숙제 검사 비슷했다. 숙제 노트에는 ‘참 잘했어요’라고 쓴 고무도장이 찍혔다.
한국 정부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을 끌어당기려는 미국에 박자를 맞춰왔다. 이달 말에는 첫 ‘한-태평양 도서국 정상회의’도 개최한다. 이런 형식의 정상회의는 지난해 9월 미국이 처음 개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22일 파푸아뉴기니에서 태평양 도서국 정상들을 다시 만난다. 한국이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에 발 벗고 나선 것도 맥락이 비슷하다. 중국을 누르고 패권을 지키려는 미국의 의중에 복명복창하는 모습이다. 옆에서 돕는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따라 하는 게 일반화됐다.
이 모든 게 대통령실이 “사실상의 핵 공유”라고 설명한 워싱턴 선언의 대가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백악관이 곧장 반박하면서 대가로 받은 물건의 가치는 크게 깎였다. 미국에서조차 수천㎞ 떨어진 심해에서 잠항하다 탄도미사일을 쏠 수 있는 전략핵잠수함을 한국에 기항시키는 게 군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냐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전략폭격기와 한국 전투기의 연합훈련도 과연 새로운 내용인지 와닿지 않는다. 한반도 상공에 뜬 미국 전략폭격기를 한국 전투기들이 호위하는 장면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얼마 전 만난 미국 국방부 출신 인사는 “한국에서는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전략자산을 전개해달라고 요청하고, 진보정권이 들어서면 그 반대”라고 했다. 국내 정치 수요에 따라 한국 정부의 요구가 오락가락한다는 냉소가 담긴 말이다.
세계적 문제를 풀기 위해 미국과 협력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기후위기, 전염병, 빈곤 등 공공선을 위해 힘을 합칠 분야도 많다. 하지만 미국의 전략적 의도에 따르는 지나친 ‘코드 외교’는 한국을 ‘하청 국가’로 만들 뿐이다.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이 갈수록 더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하겠다는 다짐으로 들리는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26일 오후(현지시각) 백악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에 앞서 악수을 하고 있다. 워싱턴/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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