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 19일 부산 해군작전사령부 부산작전기지에 입항한 미국의 오하이오급 핵추진 탄도유도탄 잠수함(SSBN) 켄터키함(SSBN-737) 내부를 시찰하고 있다. 미 해군 제공.
[아침햇발] 박용현 논설위원
“검사 마누라가 이런 거 받으면 안 된다니까. 이게 뭔지 알고 받아? 요것이 사과로 보이는가?”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웃음 짓는다. 검사 역의 배우 성동일은 택배로 온 수상한 사과 상자를 덜컥 받아둔 부인을 탓하며 상자의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버린다. “봐봐, 요것이 사관가?” 진짜 사과가 쏟아졌다. “사과여?… 사과네….” 개그 코드 속에, 일말의 허물도 경계하는 검사 캐릭터를 그려낸 장면이었다. 검사들의 ‘스폰서’ 폐단이 잇따라 폭로되며 김영란법 제정으로 이어지기 몇해 전 영화다. 지금은 돈다발 아닌 진짜 사과가 든 상자도 문제 되는 시대다.
영화 속 현실만은 아니었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가 청와대 홍보수석이던 2010년 그의 부인이 2000만원이 든 쇼핑백을 받았다가 돌려준 일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 후보자 부인에게 누군가의 이력서가 건네지고 쇼핑백 전달이 이뤄졌다고 하니 전형적인 인사청탁 뇌물 사건이다. 이 후보자는 “현금을 기념품으로 위장해 담아 온 것을 확인한 즉시 돌려주고 민정수석을 통해 이 사실을 신고”했다고 한다.
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 사건에서 저 사과 상자와 쇼핑백을 떠올린다. 윤석열 대통령이나 처가 쪽의 사전 인지 및 관여가 없었다는 가정하에 보면, 어느 날 돈다발이 든 사과 상자나 쇼핑백이 배달된 것과 흡사한 상황이다. 정권을 잡은 뒤 갑자기 처가 쪽 땅이 있는 곳으로 고속도로 노선이 바뀌어 엄청난 이익을 누리게 됐으니 말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고 보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다. 누군가 대통령에게 잘 보이고 싶어, 혹은 어떤 보상을 기대하며 벌인 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돈다발이 기념품으로 위장돼 전달되듯 정책결정이라는 허울 아래 건네지는 뇌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이 지닌 막강한 권한 탓에 자의에 의해서든 하급자의 간지에 의해서든 국가 정책이 대통령의 사익으로 연결될 위험을 예견하며 이런 조항을 뒀다.
“대통령은 그 직무수행에 대한 대가로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으며 … 임기 중에 연방정부 또는 주정부로부터 그밖의 어떠한 보수도 받지 못한다.”(2조1항7호)
여기에서 보수(emoluments)는 현금, 선물, 기타 유무형의 재산상 이득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해석된다. 정부 정책의 결과로, 또는 대통령직의 후광으로 대통령이 소유한 사업체나 자산이 이득을 누리게 되는 경우, 당연히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자발적으로 개인 사업체를 처분하거나 자산을 백지신탁하는 방식으로 위헌적 사태의 가능성을 제거했다.
그 예외가 도널드 트럼프였다. 자신 소유의 호텔·리조트를 공식 행사장으로 쓰기도 했고 연방·주정부 공무원들도 이들 시설을 수시로 공무에 사용했다. 국가 예산으로 트럼프의 사업을 살찌운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자신의 사업에 이용한 사례가 3400건에 이른다는 시민단체의 집계도 나왔다. 이 단체는 “대통령의 환심을 사서 특혜나 자리를 얻으려는 이들이 몰리면서 말 그대로 매일같이 부패가 대통령을 에워싼 형국”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철면피 행태를 경험한 미국 사회에서는 선언에 그친 헌법 조항에 실질적 구속력을 주기 위한 입법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실질적·잠재적으로 취득하게 되는 이득에 대해 신고를 의무화하고, 잠재적 위반 사항이 있을 때 특별검사로 하여금 조사해 의회에 보고하게 하고, 위반 사실이 드러나면 의회가 소송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법안이 최근 발의됐다. 이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법’(The Protecting Our Democracy Act)이라는 패키지 개혁법안의 일부다. 대통령의 사익 추구를 견제하지 못하면 독재와 다름없는 나라로 추락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이름이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의 사익 추구 금지에 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나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7조1항)라는 규정에 함축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원칙이다. 그럼에도 역대 대통령 상당수가 뇌물죄로 처벌받았다. 공무원 일반에 비길 바 없는 대통령직의 무거움을 인식 못한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양평고속도로는 새로운 차원에서 대통령직의 무게와 사익 추구의 문제를 시험대에 올렸다. 트럼프 호텔에 묵은 공무원들이 ‘소유자와 무관하게 그 호텔이 여러모로 좋아서 그랬다’고 해명한들 미국 국민의 불신이 걷힐 리 없듯, 여론조사에서 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특혜로 의심’하는 응답이 60%가량에 이른다. 이럴 때 영화 속 검사처럼 허물을 경계하는 공직자라면 사과 상자를 받지 말아야 하고, 누가 두고 간 사과 상자가 있으면 내용물을 쏟아봐야 한다.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알게 된 순간 펄쩍 뛰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지는 않았는지 철저히 조사할 것을 지시했어야 한다. 뜬금없을 정도로 쉬이 분개하며 거친 지시를 쏟아내던 대통령이 이 사안에는 그러지 않았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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