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에도 등장하는, 독일 출신 영국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는 미국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확보한 핵 무기 개발 정보를 1944년부터 소련에 넘겼다. 소련은 이를 기초로 자체 연구를 서둘러 1949년 첫 핵 실험에 성공했다.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은 치열한 핵 개발 경쟁을 벌였는데, 북한도 곧 ‘소련의 길’을 뒤따랐다.
‘사회주의권’ 과학기술 전문가인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의 <북한의 핵패권>을 보면, 북한은 정권 초기부터 핵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소련 모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북한 핵 과학자들은 1956년 모스크바에 설립된 연합핵연구소(JINR)에 참여해 일찍부터 핵 관련 기술을 확보했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들여온 원자로, 핵 기술과 설비의 기초 위에서, 국내산 원료에 의존하는 자력갱생 노선으로 핵 개발을 진전시켰다. 북한은 2006년 10월9일에 첫 핵실험을 했지만,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미국의 대북 정책 외에도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했다. 북한이 핵·미사일 시험을 거듭해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고조되던 2017년,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미국의 적대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중국 내부 보고서들은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정치적 불안정을 주요 요인으로 지적했다고 한다.
소련 붕괴 뒤 30년 넘게 중단되었던, 북-러 군사 협력이 다시 위험한 시동을 걸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주 5박6일간 러시아를 방문해 북한의 전략적 존재감을 과시했다. 북-러는 공공연하게 무기 거래에 나섰고, 러시아는 김 위원장에게 극초음속 미사일과 장거리 전략폭격기 등 첨단무기들을 대거 보여줬다.
이춘근 연구위원은 북-러가 단기적으로는 위성 협력, 장기적으로는 핵잠수함 협력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북한은 한반도 주변을 감시·정찰하고 정확한 공격 목표를 선별하기 위해 정찰위성 확보를 숙원사업으로 추진해왔다. 전선이 밀집한 동북아에서 북한이 잠수함에 핵무기를 싣고 다니게 된다면 한국과 일본에는 큰 위협이다. 하지만, 실제로 러시아가 북한에 위성 기술을 지원한다고 해도 시나리오는 복잡하다. “우선은 러시아 위성이 북한 상공을 통과할 때 촬영한 영상을 텔레메트리로 평양쪽 기지에 송신하고 지상에서 이것을 분석할 설비와 인력을 러시아가 제공하는 방법이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러시아가 정찰위성 자체를 제공할 수도 있지만 무게가 무거워 지금의 북한 발사체로는 쏘기 어렵기 때문에 또다른 발사체 협력이 진행될 수 있다.
미-중 갈등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흔들리는 국제질서의 틈을 북한은 영리하게 파고들고 있다. 냉전 시대 핵 협력보다 더욱 위험할지도 모를 밀착을 우려한다.
박민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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