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색으로 물든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AP 연합뉴스
[특파원 칼럼]
노지원 베를린 특파원
지난해 가을 독일 베를린에 부임하며 시작한 특파원 칼럼의 마지막 주제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베를린을 떠나며, 이 도시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1년 임기를 마쳐가는 지금 답을 내놓는다. 다양성이다. 그 사전적 의미는 “모양, 빛깔, 형태, 양식 따위가 여러가지로 많은 특성”이다. 한해 동안 베를린에서 머물며 가장 크게 체감한 가치다.
지난해 베를린에 도착해 에어비앤비로 구한 임시 거처에 머물 때였다. 집주인은 마흔세살 싱글맘. 그는 사춘기에 들어선 10대 딸과 초등학생 아들,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파트너는 아이들의 생물학적 아빠가 아니라고 했다. 평생 한국에서 살아온 이방인의 눈엔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가 생물학적 부모와 함께 살아야만 행복할 거라는 생각은 틀렸고,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베를린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아이가 있더라도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상태이거나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가족 형태가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45.3%에 이른다.(2022년 기준) 미성년인 아이와 함께 가족을 이룬 베를린 164만가구 가운데 비혼은 35만4천가구(21.6%), 한부모는 29만7천가구(18.1%)다. 법적으로 혼인 상태인 가족이 과반(89만8천, 54.7%)이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아이가 있는 가족 중 절반은 비혼이라는 사실이다. 아이가 있다고 해서 꼭 배우자가 있을 거라거나, 함께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해서 두 사람이 반드시 결혼한 사이라고 지레짐작하면 틀릴 가능성이 크다. 이 통계에는 아이 없는 결혼, 동거 커플은 포함돼 있지 않아 실제 가족 형태는 더 다채롭다.
‘정상 범주’에 넣을 수 없는 다양한 비주류가 많을 때 긍정적인 점은 차별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비슷한 공식은 나 같은 외국인에게도 적용된다. 베를린에는 외국인이 엄청 많다. 2022년 베를린 인구 375만명 가운데 외국인은 등록된 사람만 95만여명(약 25%)에 달한다. 독일 16개 주 가운데서도 외국인 비중이 가장 크다. 얼굴색만 보고 그가 독일 국적인지 외국인인지 알 수 없다. 백인이라고 해서 다 독일 시민이 아니며, 동양계, 아랍계, 아프리카계라고 모두 외국인은 아니다. 다양한 빛깔의 사람이 한데 섞인 상황에서 자칫 잘못 넘겨짚었다간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진짜 어디에서 오셨어요?”(Where are you ‘really’ from?) 질문은 명백한 인종차별이다.
독일 수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2020년 6월14일(현지시간) 수천 명이 참여한 가운데 인종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인간사슬’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베를린/EPA 연합뉴스
베를린이란 도시가 성적 다양성이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성소수자(LGBTIQ: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인터섹슈얼 등 모든 퀴어인)의 천국이자 피난처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도시엔 성소수자를 위한 클럽과 술집만 수백곳에 이른다. 1897년 세계 최초로 게이·레즈비언 운동단체가 만들어지고, 1919년 첫 레즈비언 소설이 출간되고, 첫 게이 영화가 상영된 곳도 이곳 베를린이다.
연고도 없는 이 도시가 고향보다 편하게 느껴진 때가 적지 않았다. 그건 아마 베를린이 머금은 다양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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