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교육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수학능력시험 ‘킬러문항 배제’ 논쟁은 현행 입시제도를 둘러싼 각종 문제점이 다시 한번 공론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 교사의 극단적 선택을 통해 공교육의 한 단면이 드러나면서, 교육주체들의 여러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들의 바탕에는 승자독식 사회의 그림자를 그대로 담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 현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실해져 가는 공교육의 이면에는 갈수록 고도화, 효율화돼 번성하는 사교육이 존재합니다.
한겨레는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작가 10명과 손잡고 한국 교육의 현실을 소재로 한 미니픽션 10회 연재 ‘슬픈 경쟁, 아픈 교실’을 시작합니다. 격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이번 기획에는 장강명 정진영 주원규 한은형 최영 정아은 지영 염기원 서윤빈 서유미 작가가 함께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너 바보냐?”
국어시험 문제가 어려웠다고 호소하자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다정하고 따뜻한 느낌인지, 정확하고 비판적인 느낌인지, 그런 걸 왜 생각해?”
그것은 내가 중간고사에서 틀린 세개 문제 중 하나였다. 시 한편을 예시로 준 뒤 어떤 느낌으로 낭독해야 하는지를 고르는 문제였고, 나는 다정함과 정확함 사이에서 수십번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정확한 느낌으로 낭독해야 한다는 쪽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그 문제 때문에 국어 점수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너 김민하 작가 알지? 교과서에 소설 실린 사람. 그 사람이 자기가 쓴 소설이 나오는 수능 문제를 푼 적이 있어. 그런데 그 사람이 고른 답이 오답으로 나왔대. 이게 뭘 말하겠니? 직접 본문을 쓴 작가가 자기 느낌으로 답을 골라도 틀리는 게 대한민국 국어 문제야. 그런데 너 같은 애가 자기 느낌으로 답을 골라서 그걸 맞춘다? 그게 되겠냐, 이 멍청아?”
언니의 요지는 이랬다. 어울리는 낭독 어조를 묻는 국어 문제에 진심으로 응하면 안 된다. 절대로. 무조건 출제자의 의도를 생각하고, 가장 ‘전형적이고 뻔한’ 답을 골라라. 그래야 정답을 맞출 수 있다. 언니의 표현에 따르면 ‘개인 신조 금지, 개성 발현 금지’만이 살길이었다.
“나 내 느낌 같은 거 생각 안해.”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도록 나는 힘주어 말한다. 전 과목 1등급으로 가뿐하게 S대학 수시에 합격한 언니는 대학생이 되어 멋을 내고 나다니느라 바쁘다. 얼른 나가야 한다면서, 아침을 먹는 동안 벌써 열번도 넘게 시계를 보았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면서도 내 시험 이야기가 나오자 눈에 불을 켜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내 느낌 따라가려 했던 게 아니고, 그냥 출제자의 의도가 뭔지 헷갈렸을 뿐이야.”
“너는 그게 문제야.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거. 그냥 문제집 세권 사서 싹 풀어. 두세권 풀면 문제 패턴 다 잡혀. 이 시가 어떤 느낌인가, 이 글을 어떤 어조로 낭독해야 하는가, 이런 게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고민이거든? 시에 자기 느낌을 가지면 안 된다, 그게 대한민국 국어 교육의 핵심이라고! 대체 몇번을 말해줘야 하니?”
문제집 풀어라, 네 개인 느낌을 갖지 말아라, 그동안 수십번 반복해온 후렴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언니가 피아노 위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더니 벌떡 일어나 제 방으로 달려갔다.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며 옷을 찾는다, 귀걸이를 찾는다,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언니를 보며 밥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언니의 억측과 달리, 나는 시험에 나온 본문을 볼 때 그에 대한 내 느낌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만들 때 어떤 답을 기대했을까? 최대한 출제자의 마음에 이입해 들어가려 노력한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틀린 문제의 경우, 처음엔 ‘다정하고 따뜻하게’ 가 답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두번째 연에 나온 ‘견고한’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견고하다는 말이 들어간 시를 다정하고 따뜻하게 낭송해도 될까? 어쩌면 이 시를 진정 어울리게 읽는 방법은 정확하고 비판적으로 읽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겨났다.
본문을 반복해 읽을수록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 문제는 킬러 문제일 것이다! 학생 대부분의 판단이 따뜻함 쪽으로 쏠리게 하지만 실은 ‘정확하고 비판적’으로 낭송해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답일 것이다. 깊은 생각 없이 다정하고 따뜻함을 택하는 다수 학생들과, 함정에 빠지지 않고 정답을 골라내는 내 모습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떠올랐다. 답에 포함된 ‘정확한’이라는 세글자도 내 선택을 확고하게 뒷받침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망설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컴퓨터용 펜으로 답을 기재해 넣으려는 순간, 마음에 커다란 파동이 일었다. 진짜? 진짜 이런 시를 ‘정확하고 비판적으로’ 낭독해야 한다고 생각해? 다시 읽어보니 시가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읽어야만 하는 단 한편의 시가 있다면 바로 이 시일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펜으로 답 칸을 채우려 하면 ‘정확한’이라는 문구가 눈앞에 커다랗게 떠올랐다.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출제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누구나 그 답을 고르리라는 걸 알 텐데 그런 쉬운 문제를 냈을 리 있겠는가. 시험종료를 3분 남긴 시점, 내 마음속에 이 문제야말로 변별력을 위한 킬러 문항이라는 확신이 밀려왔고, 나는 과감하게 마킹했다. ‘정확하고 비판적으로’ 낭독해야 한다는 3번으로. 그리고 나는 우리 반에서 그 문제를 틀린 유일한 학생이 되었다.
비운 밥그릇과 수저를 싱크대로 가져가는데, 식탁 한구석에 놓인 만원짜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회사 감사 시즌이라 엄마는 요즘 새벽에 나가서 한밤중에 들어온다. 이런 시즌에 엄마는 만원짜리를 뭉텅이로 식탁 위 바구니에 넣어둔다. 저녁때 언니와 내가 먹을 저녁식사를 준비해주러 오는 할머니가 장 볼 때 쓰시라고 비치해둔 ‘장보기용’ 돈이다.
실은 중간고사를 치기 이틀 전, 바구니에 담긴 만원짜리를 꺼내 썼더랬다. 국어문제집을 사기 위해서였다. 국어문제집을 사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가 이미 국어학원에서 제공한 문제집을 갖고 있음을 지적했다. 언니는 학원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거뜬히 국어를 백점 맞아왔었다는 후렴구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그런 엄마에게 국어 문제집을 또 사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구니에 담긴 만원짜리 두장을 꺼내 썼더랬다. 다른 데 쓴 것도 아니고 문제집 사는 데 썼으니 괜찮은 거라고 되뇌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나쁜 짓’을 한다는 느낌이 묵직하게 걸려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언니에게 ‘넌 바보냐?’라는 말을 듣고 나니 화가 치민다. 모든 국어 문제집을 사다 풀어야겠다는, 기말고사는 반드시 만점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는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시험을 봤다 하면 만점을 받는 ‘천재형’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엄마의 표현에 따르면 ‘쓸데없이 문제집은 많이 푸는데’ 성적은 변변치 않게 나오는 ‘둔재형’이었다. 가끔 글쓰기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오지만, 언니 표현에 따르면 그건 ‘다 쓸데없는’ 상이고, 나는 ‘진짜 중요한 학교 시험에서는 꼭 두세개씩 틀려서 1등급에서 미끄러지는 멍청이’였다. 반에서는 잘하는 축에 들고 일부 선생님들은 나를 똑똑하다 평하기도 하지만, 엄마와 언니의 평가는 단호하다. 나는 ‘해도 안되는 애’인 것이다. 그리고 내 머릿속을 점령하는 것은 언제나 엄마와 언니가 내리는 평가의 말이다. 해도 안되는 애, 열심히 하는데 요령을 모르는 애.
그릇을 싱크대에 놓고 방으로 가려던 내 발길이 식탁 앞에 멈추어 선다. 바구니에 담긴 만원짜리들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온다. 여러장이 겹쳐진 채 반으로 접혀 있는 푸른 돈더미. 저 중 두개를 빼내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바쁜 시즌에 엄마는 내가 몇장을 빼가도 눈치를 채지 못한다.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손을 내밀어 만원짜리에 손을 얹는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몸이 떨려온다. 어쩌면 엄마는 이번에야말로 눈치채고 호통칠지도 모른다. 누가 여기 있던 돈에 손댔니! 할머니 장 보시라고 둔 돈인데! 손을 허리춤으로 되돌린 뒤 나는 식탁 앞에서 굳어진다. 푸른 돈의 형상이 흐릿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뇌리 어딘가에서 5분 만에 이를 닦고 옷을 입지 않으면 지각할 거라는 경고음이 울려 퍼지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머릿속에서는 2만원을 들고 서점으로 향하는 장면이 계속 반복된다.
정아은 | 2013년 제18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모던하트’, ‘잠실동 사람들’, ‘맨얼굴의 사랑’,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 에세이 ‘엄마의 독서’,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높은 자존감의 사랑법’,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논픽션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을 썼다. 다수의 매체에 칼럼과 에세이를 기고하며, 월급 사실주의 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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