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 칼럼
2월11일 여수 화재참사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가까이 지났다. 주로 ‘방화’ 사실에 방점을 찍으며 ‘엽기 사건’ 다루듯 크게 보도한 이땅의 주류 언론은 2월26일 조선족 중국인 한 분이 숨을 거둬 사망자가 열 명으로 늘어난 일이나 사고 피해자들 중 일부를 강제 출국시킨 일에 대해선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이 이땅에 던지는 의미가 그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는 듯이, 여수의 비극은 한국사회에서 이미 종결된 사건이 된 듯하다. 남의 땅에서 긴 세월 이주 노동자로 산 경험 때문일까, 아니면 수치심과 함께 측은지심을 인간성의 일차적 조건으로 꼽았던 선현의 가르침 때문일까?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이 사회의 ‘보호’라는 말이 뿜어낸 인권 불감증에서 섬뜩함을 느낀다.
위정자마다 개방만이 살길이라고 외쳐대는 세계화된 세계, 그러나 세계화된 세계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다. 자본은 하루 24시간 마음껏 국경을 넘나들고 상품도 5대양 6대주를 넘나들지만 사람만은 그럴 자유가 없다. 오로지 자본이 허용할 때만 이동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가난한 제3세계인들은 자기 땅을 떠나려고 힘겨운 송출 브로커 비용을 물거나 아예 남의 땅에 숨어들고자 목숨을 걸기도 한다. 우리는 가끔 지중해에서 검은 대륙인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토픽뉴스처럼 듣는다. 그처럼 그들은 고향을 떠나려고 몸부림치는데,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자본 축적기에 그들의 조상은 그 땅을 떠나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울부짖었다. 그러나 자본 축적기의 인간은 무자비했고 수천만이 노예로 팔려나갔다. 그렇게 강제로 ‘노예’로 끌려갔던 조상들에 비해 오늘날 ‘현대판 노예’가 되려고 자발적으로 고향을 등지는 그 후예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그래도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 후예들처럼 그들도 현대판 노예로 이땅에 들어왔다. 시장전체주의 사회에서 구매력 없는 사람은 사람 대우를 받을 수 없다. 그들은 인간 이하의 생명체일 뿐이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을 감수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사랑하는 것들을 희생할 만큼 저주받은 존재인 그들에게 천박한 물신주의 가치관으로 무장한 이 사회는 가차없는 멸시와 천대의 눈길을 보냈다. 생존을 위한 그들의 위태로운 몸짓은 그 삶만큼이나 비참하고 외롭게 끝났다. 간혹 그들이 “우리도 인간이다!”라고 절규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말할 때, 이 팍팍한 사회는 구성원 대부분에게 “그럴 여유가 없다”며 외면하도록 했다. 그들의 죽음을 자본권력의 충실한 관리자인 국가의 ‘합법적 폭력’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살해’라고 말해야 하는 까닭이다.
우리네 몸은 건강하지 않을 때 대부분 자각 증세를 보이지만, 의식은 병들어 있어도, 그래서 비인간성, 반민중성을 갖고 있어도 그것을 자각하는 대신 그 비인간적이며 반민중적인 의식을 고집한다.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조건은 그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면서 그 사회의 인권과 노동조건의 바로미터가 된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과 연대하지 않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국인들이 이주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대신 우리가 일궈 온 텃밭에 불쑥 들어와 과실을 탐하는 부랑인처럼 바라볼 때 ‘분열시켜 지배하는’ 자본의 위세는 더욱 거칠 게 없어진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인격체인 자본의 마름이나 머슴 처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인간성은 더욱 마모되고 반민중적으로 오염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남긴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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