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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대학평준화를 위한 상상력

등록 2007-09-11 18:09수정 2018-05-11 15:57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칼럼
“학벌 사회와 대학 서열 체제로 말미암은 입시교육은 우리 아이들의 몸과 영혼을 망치는 주범입니다. 이러한 교육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입시 폐지와 대학 평준화입니다.” 지난 8월30일 진주를 출발하여 9월20일까지 전국을 일주 중인 정진상 경상대 교수는 ‘학벌 철폐’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의 깃발을 내걸고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다. 그는 지금처럼 무한 입시경쟁이 지속되는 한 학교 현장에서 참교육과 전인교육을 실천할 여지가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국의 교육 현실은 광란 그 자체다. “한번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미친 세상”이 낳은 결과다. 최근 학력위조 파문은, 학생·학부모·교사, 다시 말해 국민 모두 겪는 엄중한 현실에 비하면 불거진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영방송을 비롯한 주류 언론은 학벌체제의 본질보다는 그것이 낳은 현상에만 초점을 맞춰 선정적 보도에 머물고 있다. 비겁하거나 상상력이 빈곤한 탓이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또 한 번의 냄비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대학 평준화 주장이 변혁적인가? 우리 교육현실이 빚어내는 온갖 병리 현상에 비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비현실적인가? 당장 유럽 나라들의 대학을 살펴보라. 그리고 부디 잠깐만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상상력을 동원하라. 그것은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엔 불가능한 꿈을 품자”던 게바라의 꿈을 요구하지 않는다. 또 “부자 되세요”의 ‘부자’가 소크라테스의 “배부른 돼지가 되지 말라”의 ‘배부른 돼지’와 어떻게 다른지 묻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일상의 덫, 기득권의 덫에서 벗어날 만큼만 생각하는 동물에 충실해도 쉽게 닿을 수 있는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대안이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함이 삶에 대한 열정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 오늘을 끊임없이 희생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것이 경쟁력을 낳는다고? 초·중·고를 지내며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암기하고 문제 푼 것이 오늘 그대에게 남긴 게 무엇인가? 그것이 벗과도 자연과도 사귀지 못한 채 좁은 공간에 갇혀 등수와 등급의 노예가 되어 학습 노동에 시달리면서 피폐해진 인성, 닫힌 상상력에 값할 만한 것인가?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조기유학과 국외연수 열풍, 천문학적인 사교육비에 값할 만한 것인가? 그러나 오늘 그대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대학 간판뿐이다. 그것이 국가 경쟁력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그 대학들이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가. 또한 대학간판 따기에 성공하여 사회 상층을 차지한 군상들이 연일 신문지상에 어떤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한국의 대학 서열 체제는 과거 ‘반상’을 구분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열’을 매기는 제도다. 인생의 서열이 이미 매겨졌기에 자기성숙의 모색이 정지된다. 그뿐만 아니라 학벌이 형성되어 견제와 비판에서 벗어나 있다. 한국의 엘리트층에게서 사회적 책임의식은커녕 능력조차 기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회 구성원을 대학간판의 굴레에서 해방시키자. 대학간판의 억압에서 벗어난 개인들은 남과 경쟁하는 것만이 아닌 자기와 싸우면서 공정한 경쟁게임에 나설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이 상호 비판과 견제 아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구조가 될 때 국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고, 민도가 높아져 문화국가의 지평을 열 수 있다. 대선을 앞둔 계절, 대학 서열 체제를 대학 평준화로 혁파하겠다는 상상력을 가진 후보는 누구인가?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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