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칼럼
아무리 자율통제가 사라진 사회라지만 도무지 예외가 없다. 이명박 시대에 사회귀족의 반열에 오른 사람치고 뻔뻔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 모든 매체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격리시키자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다.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편이 “뻔뻔하다, 고로 나는 지배한다”를 학습시키는 것보다는 낫겠기 때문이다.
이미 영악해진 아이들이지만 아직 나라의 중요한 일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능력과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지 모른다. 그 아이들에게 사회귀족의 뻔뻔함을 배우게 하고 삶의 지침으로 삼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더구나 순진무구해야 할 아이들인데 슈퍼에서 “‘싸과’ 주세요” 했더니 비로소 알아듣더라고 빈정거리며 웃게 해선 안 되는 일 아닌가. 올바른 교육환경에서도 나와 사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올바른 가치관과 분별력을 갖기는 어려운 법인데, 하물며 성찰의 주체가 아닌 암기 기계로 길러지는 교육풍토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비양심과 몰염치가 사회적 지위와 부를 거머쥐는 데 장애가 되기는커녕 도리어 필요조건이라는 ‘실용’의 처세술을 아이들이 눈치 채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야말로 염치없는 일이다.
오늘 한국의 사회귀족 체제는 어미 뱃속에서부터 신분이 규정된 과거와 달라 아직은 후천적 신분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귀족이 되어서 뻔뻔한 것인가, 아니면 뻔뻔해야 사회귀족이 되는 것인가? 후자가 맞다. 오늘 한국의 사회귀족 체제는 사회귀족의 자율 통제는 물론 기대할 수 없고 아래로부터의 견제도 작동하지 않는 대신 뻔뻔해야만 사회귀족 사이의 횡적 견제에서도 자유로워 퇴출당하지 않는 구조를 갖는다.
가령 이회창씨의 권력에 대한 미련은 무엇보다 억울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자식 군대 문제라는 성질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오늘이었다면 별문제 없었을 터였는데 시기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외 없이 모두 그 짓을 저질렀겠지만 5년 전에는 그래도 공인의 그 짓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견제력이 살아 있었는데, 오늘은 그 최소한의 제어장치마저 무너졌다. 이중 잣대가 사라져 더 솔직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능력껏 비리와 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선망할 뿐 분노할 줄 모르는 사회보다는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사회가 더 건강한 사회다. 능력껏 땅 투기하기, 능력껏 위장전입하기, 능력껏 자식 군대 안 보내기, 능력껏 탈세하기의 ‘능력’이 견제·비판되지 않는 사회귀족의 자격 조건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권선징악의 해피엔드는 동화책에나 있다는 아이들의 명민한 견해는 다시금 증명되었다. 선거를 통해 선택한 대통령의 선택이니 토 달지 말라는 주류 신문의 주장이나 이명박 정부의 방송통제 시도나 그 성질은 한가지로 뻔뻔함인데, 그나마 조금치의 눈치라도 보는 것은 아직 총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 총선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총선이라는 제도가 그나마 사회귀족 체제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크게 기대할 수 없지만 그것밖에 남아 있지 않은 민주주의 장치라는 점을.
다큐멘터리 속 민주주의는 열정과 역동의 살아 있는 드라마와도 같다. 그러나 생활 속 민주주의는 감동적이지 않다. 그래도 그 힘은 살아 있어야 한다. 돌아보면 ‘민주’라는 말만으로도 울컥했던 때가 그리 멀지 않다. 다시금 시대는 냉소를 떨쳐내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 줌의 사회귀족이 ‘능력껏’ 요리하는 사회가 아님을 아이들과 웃으며 말할 수 있기를 바라기에.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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