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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철학자 김상봉이 가는 길

등록 2008-03-30 19:36수정 2018-05-11 16:00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칼럼
몰상식이 상식을 억압하는 뒤집힌 세상을 살면서 인생 선배 중에 리영희 선생처럼 뒤따를 스승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허접하다 못해 추악한 세상에서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기 때문이다. 후배 중에도 그런 분이 있으니 전남대 철학과의 김상봉 교수가 그 중 하나다. 귀국하자마자 나를 시민단체 ‘학벌 없는 사회’로 이끈 이가 그였고, <도덕교육의 파시즘> <학벌사회>와 같은 저작으로 일천하면서도 편향된 독서에 폭과 깊이를 더해준 이가 그였다.

그가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 후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부박한 땅에 진보정치가 작은 뿌리라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절박한 시기에 적극적으로 몸을 던지지 못한 나에게 그의 ‘몸 던짐’은 ‘서로주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또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그리스 고전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이 부럽듯이 나는 그가 대학 교수인 게 부럽다. 언론계 종사자는 할 수 없는 정치활동을 대학 교수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언론인도 현실권력의 품에 안기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지만, 그 현실권력에 맞서는 견제 정치력이 될 수만 없다. 더 황당한 일은 대학 교수는 정치활동이 가능한데 교사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학 교수는 성년인 대학생을 가르치는 데 반해 교사는 미성년의 학생을 가르친다는 게 이유인데, 그렇다면 ‘도덕교육의 파시즘’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정치적 동물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일방의 억압이라는 문제점을 제기해야 할 진보언론조차 스스로 손발을 묶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실권력과 견제 정치력을 등치시킨 데서 비롯된 잘못이다.

시끌벅적한 공천 드라마는 마무리되었고 거리는 선거로 소란하다. 4년 만에 나으리들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민’을 주인대접하기 바쁘다. “영국인들은 투표일에만 자유롭다”던 루소의 말 그대로다. 권력의 향내에 스스로 취하지 않고서야 아쉬울 것 없는 그들이 허리 굽힐 일이 있겠는가 싶지만 그들의 낮은 자세에 짐짓 황송하여 차마 한 손으로 악수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이 땅의 ‘민’이다. 아직 ‘민’이 시민주체로 서지 못한 사회에서 가진 자의 욕심은 대의가 되고 없는 사람의 대의는 욕심이 된다. 진보정당의 빈한한 후보들이 권하는 악수에 황망하게 응하는 시민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들, 그들이 내민 가난한 손에 똑같이 가난한 ‘민’은 주인의 자세로 훈계하거나 야멸스럽게 외면한다.

양대 보수정당의 비례대표 후보들과 달리 진보정당의 비례대표 자리, 그것도 후순위 후보는 확률을 말하기조차 민망하다. 선거기간 무관심 앞에서 몸과 마음을 혹사하는 한편 권력에 다리를 놓는다는 비난까지 들어야 한다. ‘친박연대’가 ‘연대’의 뜻을 ‘친박연대’처럼 만들고 ‘보이지 않는 사회연대의 실현’이라는 정치 본연의 뜻이 실종된 땅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너무 점잖아 구름 위에 올라 앉아 사회를 분석하고 진보를 토론할 뿐이다. 지식인들조차 시민주체 형성에는 고대 그리스인에게 미치지 못한 탓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은 어느 날 현실권력이 불러줄 것을 미리 차단하지 않는 용의주도함일 수도.

불가에서 ‘청산리 벽계수’가 아닌 ‘진흙탕의 연꽃’을 상징으로 삼은 것은 깨달음의 명쾌한 답이다. 썩지도 묻히지도 않고 꽃 피울 수 있기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대부분 썩거나 묻혀버렸지만 이따금 썩지도 묻히지도 않고 살아남아 빛을 발하는 이들이 있다. 김상봉, 그가 가는 길에 나는 언제나 천진난만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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