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시민편집인의 눈 / ‘가속화시키다’ ‘보여지다’에 ‘찌질하다’ ‘쩐다’까지 등장
‘속도가 가팔라지고’ ‘자리를 거머쥐다’니…호응관계 유의
‘진노’ ‘공권력’ ‘대오’ 등 비민주적/운동권 용어 자제해야 지금부터 꼭 80년 전인 1929년에 나온 최현배 선생의 <우리 말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에는 흔히 ‘시키다’를 그릇 쓰는 수가 있나니, 그는 ‘하다’로 넉넉한 것을 공연히 ‘시키다’로 하는 것이다.” 그런 사례는 <한겨레> 지면에서 수도 없이 눈에 띈다. ‘경기침체를 더욱 가속화시킬…’(3월2일 32면, “잡셰어링 본래 뜻…”), ‘대만과 중국을 살살 자극시켜 경쟁시키면’(3월23일 21면, “WBC, 그 씁쓸함에 대하여”) 등등. 그야말로 ‘가속화할’ ‘자극해’로 넉넉한데 ‘시키다’라는 사역형을 중복되게 붙여 놨다. 최현배 선생이 ‘순한글’ 신문인 <한겨레>를 보았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뜻은 기특하다”면서도 “그렇게밖에 못해” 하는 질책이 떨어졌을 듯하다. 아름다운 우리말이 오염되고 언어생활에 혼란이 오는 것은 신문과 방송 탓이 크다. 특히 ‘순한글’ 신문임을 자랑하는 <한겨레>에는 더 막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수동형을 이중으로 쓰는 것도 명백한 오류다. ‘오바마는 양국 정상 간에서 보여졌던 전례와 달리’(3월6일 14면, “미국의 변심? 영국의 굴욕!”)에서 ‘보여졌던’은 ‘보였던’의 잘못이다. ‘보여지다’는 ‘보다’의 수동형 ‘보이다’에 다시 수동의 뜻이 있는 ‘-어지다’를 덧붙인 이상한 조어이다. 수동형의 남발은 영어 번역투 문장을 흉내 내다 그리 되는 때가 많다. ‘읽힌다’는 표현은 뭔가 남다르게 써보려던 몇몇 문학평론가들의 글에서 자주 발견되더니 이젠 너도나도 따라 하는 유행어가 됐다. 최근 이틀치 신문에도 세 차례나 등장했다. ‘조용히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3월21일 4면, “‘기자억류’ 당사국들…”), ‘민주당과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전략도 읽힌다’(3월23일 6면, “한나라 ‘갈등의 정치인’…”), ‘돈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한 자신감의 반영으로 읽힌다’(3월23일 3면, “‘야인’ 추부길에게도 건넸는데…”). 수동형의 남발은 원래 우리 언어습관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이 죽는 것까지 ‘돌아간다’는 식의 능동형으로 표현한다. 영화 <워낭소리>에서 보건소 의사는 병들고 쇠약한 몸으로도 농사 일손을 놓지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일 줄이지 않으면, 할아버지, 세상 버려요.” 세상에 의해 사람이 버려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버린다는 식이다. 특히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수동형의 남발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범죄나 전쟁 등의 피해자만 부각되고 행위 주체는 적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엄 촘스키가 지적했듯이, 수동형 문장은 전쟁 보도에서 ‘민간인이 사살되었다’고만 할 뿐 ‘미국이 그들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이다. 신문 기사에 특히 어색한 문장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기자들이 문장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선배들의 잘못된 문장까지도 기사문의 전형인 양 도제식으로 답습한 탓이 크다. 동사를 쓸데없이 명사형으로 바꿔 쓰는 것도 그런 악습 중 하나다. 예를 들어 “납품단가 부당인하…”(3월2일 31면) 기사에서 ‘공정위가 대기업의 부당 납품단가 인하 관련 직권조사를 벌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라는 문장은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하는 게 자연스럽다. 또 이런 문장의 앞에는 대개 비슷한 내용을 담은 ‘리드’ 문장이 나오니까 반복할 필요 없이 그냥 ‘공정위는 처음 이런 조사를 벌였다’는 식으로 쓰면 그만이다. 이오덕 선생은, 문익환 목사가 “우리말은 동사를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라고 해서 가만히 돌이켜보니 자기가 신문이나 책에 나온 잘못된 글을 바로잡은 것 가운데 대부분이 명사형을 다시 동사형으로 고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어와 술어, 목적어 사이 호응관계는 명문과 악문을 가르는 잣대가 된다. “삼성화재, 유관순체육관서 3·1절 만세”(3월2일 23면) 기사에서 ‘신경전을 보였다’고 했는데 신경전은 ‘보이는’ 게 아니라 ‘펴는’ 것이고 ‘벌이는’ 것이다. “‘연체율 비상등’ 은행권 심상찮다”(3월19일 25면) 기사에는 ‘경기침체 속도가 가팔라지고’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속도는 ‘가팔라지는’ 게 아니라 ‘빨라지는’ 것이다. ‘대통령 자리를 거머쥐었다’(12월1일 6면, “의원님들 ‘입각 김칫국’”)고 표현했는데, 자리를 차지할 수는 있어도 거머쥐는 건 이상하다. 같은 어미를 반복해 악문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메신저 피싱’ 쇼핑몰서 정보 낚았다”(2월18일 12면) 기사의 첫 문장을 예로 들어 보자. ‘유명 인터넷 메신저에 접속해 친구와 선후배 등으로 가장해 돈을 요구해 챙긴 ‘메신저 피싱’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 문장에는 ‘접속해’ ‘가장해’ ‘요구해’라는 표현이 이어진다. 이 기사 중간쯤에는 한 문장에 ‘접속해’ ‘통해’ ‘접근해’ ‘요구해’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단어나 용어 선택에도 신중해야 한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관련 비리 수사에서 숨겨진 거액의 비자금이 심심찮게 등장한 것도…’(3월20일 26면, “차명계좌 제약…”)라는 문장에서 ‘심심찮게’는 기사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비자금이 등장하지 않으면 심심하다는 얘긴가? 무심코 비민주적·권위주의적 용어를 쓰는 경우도 많다. 용산참사 때는 ‘공권력’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쓰였는데 그냥 ‘경찰력’이나 ‘경찰’로 하면 될 일이다. ‘공권력’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양면성에 대해서는 김수환 추기경이 잘 정리했다. 그는 1980년 광주 유혈사태에 대해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며 “공권력이란 본시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것인데, 인권 탄압에 쓰이면 이는 공권력이 아닌 폭력”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화내면 ‘진노했다’는 표현을 종종 쓰는데, ‘진노했다’는 말은 ‘존엄한 사람이 몹시 노했다’는 뜻이니 권위주의 냄새가 난다. 어려운 한자말이나 전문가들만 쓰는 용어를 적절한 설명 없이 마구 쓰는 것도 한글신문의 장점을 단점으로 만드는 자충수다. ‘등정주의’와 ‘등로주의’(2월13일 19면, “‘산악서적 출간’ 30년…”), ‘성 인지적 관점, 인권 감수성’(2월18일 13면, “민주노총 안팎 쓴소리”) 등 사례가 상당히 많다. 그렇다고 우리말 사전 구석에서 찾아낸 순수 우리말을 지나치게 자주 쓰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의미 전달의 문제와 함께 자칫 우리말에 대한 혐오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구어체가 좋다 해서 비속어를 활자매체에 그대로 옮기는 것도 문제다. “인디 록밴드 국가스텐 ‘돌풍 장전’”(3월3일 19면) 기사에는 “찌질하잖아요”, “우리가 좀 쩔긴 하죠”라는 말이 그대로 나온다. 운동권에서 즐겨 쓰는 용어(‘방향성’ ‘대오’ ‘가열차게’), 정치 기사에 많이 등장하는 비민주적 용어(‘표밭갈이’ ‘텃밭’), 전투적 용어(‘살생부’ ‘전운’ ‘대학살’ ‘진검승부’)도 가능하면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우리 선거를 지역감정 싸움으로 몰아넣고 정치를 더욱 살벌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또 건강 기사가 아닌 데서 환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자폐증’ ‘레임덕’ ‘정신분열증’ 같은 용어들을 꼭 써야 하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자. 기사를 쓸 때 작은 데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기사 방향과 같은 큰 가닥을 잡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독자의 신뢰는 작은 데서 허물어진다. 그물에서 물이 금방 빠져나가는 것은 그물눈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많기 때문이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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