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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박정희 시대를 위한 변명 / 최우성

등록 2009-10-27 21:12

최우성  금융팀장
최우성 금융팀장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습니다.”

지난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30주기 기념행사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한 말이다. 박 전 대통령을 일러 개발독재를 일삼아온 ‘성장 중독증’ 환자 따위로 단칼에 치부하는 데 대한 서운함을 작심한 듯 드러낸 것일 게다. 우습게도, 정작 박정희란 이름 석 자에 기대 오로지 성장 지상주의만을 좇는 주인공들은 바로 지금도 우리 사회 지도층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박정희 키드’들이다. 정치권과 관료, 기업, 언론, 학계에 이르기까지 차고도 넘친다.

박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와 그의 시대에 대한 평가는, 독재 대 근대화라는, 여전히 진부한 ‘짝패’로만 남아 있는 느낌이다. 그의 시대에 우리 경제가 역사상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성장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원인을 단 한 가지로 재단하는 건 무모한 일이다. 정말이지 그의 탁월한 리더십이 큰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고, 때마침 선진국에서 남아도는 자본을 싼값에 끌어다 쓸 수 있는 역사적 행운을 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성장주의자냐 복지주의자냐라는 물음과는 별개로, 진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마치 ‘욱일승천하듯’ 활기가 넘친 경제 시스템을 가능하게 만든 당시의 ‘토양’이 그것이다. 다소 거칠게 말하면, 자본주의란 출발조건이 평등할수록 빨리 발전(성장)하되, 단 발전할수록 되레 불평등을 낳기 마련이다. 숨길 수 없는 자본주의의 역설이자 숙명이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계층 간 불평등 정도가 상당히 줄어들었던 60년대의 한국 사회는, 우리와 똑같이 독재를 경험했음에도 계급·계층 간 격차가 훨씬 더 컸던 남미 대륙과는 성장을 위한 토양의 ‘비옥도’ 면에서 분명 달랐다. 80년대 이후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이 성장률 신기록을 잇달아 갈아치우는 또다른 비밀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잠시 자본주의가 걸어온 수백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성장에 무게를 싣던 한 시대가 끝나고 나면 성장 지상주의의 폐해를 ‘수리’하던 또다른 시대가 한동안 예외 없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대략 30~40년의 긴 사이클을 두고서 말이다. 성장 일변도의 정책이 남긴 불평등과 양극화의 상처를 서둘러 꿰매지 않고서는, 정작 더 이상의 성장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냉엄한 사실을 그들은 깨달았기 때문이다. 온갖 비난과 한계에도, 지금까지 자본주의 체제가 지탱해온 비밀이다.

이 땅은 다시 박정희 키드의 세상. 하나, 그 토양은 30년 전과는 분명 천양지차다. 계층·지역 간 간극은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벌어지고 있다. 계층 간 자산격차의 골은 더욱 깊게 파이고, 감세의 혜택은 부자에게 일방적으로 몰린다. 모든 게 성장이란 이름을 내걸고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야만 언젠가 복지사회가 올 것이라고.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본주의란 꿈을 먹고 자라나는 체제다. 냉정하게 말해, 그 꿈은 남과 같아지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남과 달라지려는 욕구다. 꿈을 잃어버린 자본주의, 꿈을 심어주지 못하는 자본주의는 이미 죽은 것이다. 남과 서로 다른 출발선상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내 절망하고 지레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갈수록, 경제는 결단코 ‘성장’할 수 없다. 오래전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 박정희 시대가 이 땅의 수많은 박정희 키드들에게 던지는 진짜 값진 교훈이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반체제 세력이 아니라면 말이다.

최우성 금융팀장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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