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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우리는 모두 ‘루저’

등록 2009-11-22 21:16수정 2018-05-11 16:06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 기획위원




한 여대생의 “키 작은 남자는 루저”, “최소한 180㎝는 돼야”라는 발언에 인터넷이 달떠 있는 동안 하나의 사건은 속절없이 잊혀졌다. 17살 청소년이 15살 동네 후배를 시켜 부모와 누나를 불태워 죽이려 한 사건이다. 범행은 기어이 저질러졌고 아버지는 살아남았지만 어머니와 누나는 숨졌다. ‘보험금을 타 강남에 살고 싶어서’라는 게 경찰이 전하는 범행 동기다.

충동적인 돌출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났다고 보기 때문일까, 어이없고 충격적인 사건에 한국 사회는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심각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끔찍한 사회병리 앞에서 교육계도 종교계도 언론계도 꿈쩍하지 않는다. 토론도 없고 모색도 없고 그에 따른 실천도 없다. 엽기적인 일에 놀라지 않는 것보다 더 엽기적인 일이 없는데, 이 또한 저지를 뿐 책임지지 않는 사회를 반영한다.

‘180㎝ 미만은 루저’라는 말은 거의 모든 남성에게 해당되기에 뜨겁게 반응하지만 청소년이 저지른 끔찍한 범행은 나와 상관없다고 믿어서 쉽게 잊는 것일까. 그러나 오늘 한국 사회에서 ‘루저’가 강남에 살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 낙오자를 뜻한다는 점은, ‘착한’ 외모처럼 ‘좋은’ 스펙이 돈 벌 수단을 뜻한다는 점만큼이나 분명한 진실이다.

오늘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돈의 노예가 아닌 돈의 주인으로 살라는 주문은 지난 시절의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 이상으로 형식적인 허사가 된 게 아닐까. 하늘을 찌를 듯한 물신주의를 탓해야겠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톨스토이는 “너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언제인가?”라고 묻고 “바로 지금이다”라고 스스로 답했는데,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오늘을 계속 빼앗기는 청소년들에게, 그런 청소년기를 보낸 뒤 사회안전망의 부재 속에서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다시금 오늘을 빼앗기며 사는 구성원들에게 오늘의 내 존재는 물론 내가 맺는 인간관계에 성실하기를 기대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청소년들이 순간적 충동에 빠질 때 기성세대는 물질적으로 성공할 미래를 꿈꾸면서 오늘로부터 스스로 벗어난다.

가령 한국의 수많은 상가 세입자들은 용산참사를 자기 일처럼 바라보지 않는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오늘의 처지로 사회 현실을 바라보기보다 돈 많이 버는 데 성공한, 장래의 눈으로 사회 현실을 바라보는 게 만만치 않게 작용한다. 로또 복권을 사는 사람들 모두 자기가 당첨되는 꿈을 꾸고 당첨되었을 때의 자기 모습에 도취해 힘겨운 오늘을 잊듯이, 오늘은 가난한 상가 세입자의 처지이지만 장래에는 모두 성공한 사업가가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그래서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은 미래의 내 모습을 통하여 오늘의 나를 배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오늘에 성실할 수 없는 사회를 사는 데 익숙해졌다. “가장 소중한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루저’들인 것이다. 한번 태어난 존재, 오늘 내 존재에 성실하지 못하고 내가 맺는 관계에 성실하지 못하다면 그게 상실자 아니겠는가. 강남에 살겠다며 부모와 누이를 죽인 게 사실이라면, 그런 청소년을 둔 사회의 동시대인들인 우리는 이미 실패한 사회적 존재들 아닌가. 존재가 훼손되고 관계가 파괴되는 사회, 우리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참된 만남을 잃어버렸다.

고개 숙여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나를 비롯하여 동시대인들에게 아주 작은 책임감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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