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기자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은 서기 528년(법흥왕 15년)에야 불교를 받아들였다. 불교를 반대하던 신하들이 이차돈의 순교와 기적에 놀라 크게 뉘우친 뒤, 법흥왕은 비로소 불교를 널리 펼 수 있었다. 법흥왕은 신라 최초의 절 흥륜사를 중건했는데, 공사가 끝나갈 무렵 왕위를 사촌동생 진흥왕에게 물려주고 승려가 됐다. 진흥왕 역시 황룡사를 짓고 마침내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 화랑이 불교정신(세속오계)을 자기 것으로 삼아 독창적인 청년 엘리트 집단으로 성장한 것도 진흥왕 때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불교를 바탕으로 한 정신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삼국 가운데 가장 이른 372년(소수림왕 2년)의 일이다. 그러나 고구려 지배세력은 6세기부터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던 당시 중국의 풍조를 좇았다. <삼국유사>를 보면, 고구려에 도교가 전해지기 전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두미도(五斗米道, 중국 후한 말 쓰촨 지방에서 생긴 민간신앙으로 도교의 원류에 해당)를 신봉했다. 보덕화상은 이를 멸망의 징조로 보아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왕이 듣지 않자 완산주 고대산(지금의 전주 고달산)으로 떠나버렸다. 고구려가 망하기 18년 전 일이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1년)에 불법이 시작됐다. 백제 불교는 예술적으로 화려했지만 정도를 잃고 사치스러워졌다. 법왕은 599년에 전국에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물고기잡이 도구까지 불태우게 했다. 그는 왕흥사라는 큰 절을 짓기 시작해 35년이나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 절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즐겨 노닐던 곳이다. 봉은사에서 ‘좌파 주지’를 몰아내려던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음모’가 드러났다. 명진 스님이 누군지도 모른다던 거짓말도 덩달아 들통났다. 이 정권이 불교를 대하는 태도는 삼국 중 어디에 해당할까?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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