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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주 칼럼] 자식한테 무엇을 물려주지?

등록 2010-05-03 21:35수정 2018-05-11 15:06

김선주 언론인
김선주 언론인




우리 동네 페인트가게 주인아저씨는 나이가 많다. 허드렛일만 하고 주로 하는 일은 잔소리다. 데리고 다니는 일꾼 가운데 공손한 젊은이가 있다. 대학을 나와 군대 갔다 왔다니 서른쯤 된 것 같다. 칠은 물론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고 나이 든 아저씨들에게 커피도 타 바치고 일이 끝나면 빗자루를 들고 쓰레기를 깨끗이 치우고 맨 나중에 현장을 뜬다. 주인아저씨의 외아들이라고 했다. 힘에 부쳐 가게를 아들에게 넘기려고 밑바닥 일부터 배우게 했다는데, 아들도 선뜻 응했고 학원에 다니며 건축사 일, 실내디자인 일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아주 작고 단순한 칠가게였던 곳을 업그레이드시켜 2대가 계속해서 가게를 할 생각을 하니, 남의 일인데도 뿌듯했고 가게에 신뢰가 갔다.

수백억원의 주식을 물려받은 어린이들이 예년에 비해 갑자기 늘었다고 한다. 언론에선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고 했지만 그건 옛말이고 주식을 입에 물고 나온 셈이다. 부동산을 입에 물고 태어난 아기 재벌들도 많다. 자기 돈, 자기 땅을 자기 자손에게 물려준다는데 세금만 제대로 냈다면 욕할 것도 없는 일이라고 여기겠지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심정이다.

배곯게 한 적 없이 많은 자식들 대학 공부를 시켰으나 내 아버지는 남겨준 재산이 없다. 손자들이 태어날 때마다 적금통장을 딱 한 차례만 부어서 선물로 주셨다. ‘애걔, 요렇게 조금?’이라고 할 정도로 적은 금액이었다. 규모 있고 근검절약의 화신 같은 아버지는 ‘20년만 넣어라. 부담이 되지 않는 금액이니…’ 하셨다. 대학 등록금 마련에 허리가 휘었던 아버지는 아마도 손자들 대학 등록금을 걱정하셨던 것 같다.

나는 자식에게 무엇을 물려주지 하고 살펴보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별것이 없다. 결국 열심히 산 것, 최선을 다해서 산 것 이외에 무엇을 남겨주겠나 싶었다. 돌이켜보면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것은 모두 그들의 삶에서 보고 배운 것들이었다. 자신에겐 인색해도 남에겐 후하게 대했던 태도,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던 정신이랄까 하는 것이 부모한테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개별 가정에서 자식이 부모를 보고 배우는 것처럼 사회 전체적으로 우리는 이 시대의 풍조랄까 정신이랄까를 보고 배우고 듣고 자랄 수밖에 없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결코 배워선 안 되는 일을 한 사람이 성공하고 또 그것을 부추기는 막돼먹은 가치관이 판을 치고 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경향이 팽배해 있다. 온갖 비리와 협잡으로 돈을 벌고 자신도 아들도 손자도 세습해서 군대를 안 가고 그래도 돈만 있으면 또다른 권력도 따라온다고 믿고 최후의 한푼까지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는 풍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권력 가운데 가장 큰 권력이 돈인 세상이다. 그 큰 권력의 세습에 혀를 차다가도 흉보면서 닮는다고 보고 배우는 게 이런 꼴이니 이런 현상이 우리 시대의 정신이 되어 사회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 가장 두렵다. 손자가 태어났다고 주식을 기부하고 땅을 기부한다면 아기 재벌들이 자라서 본받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은 선례가 될까, 그런 재벌은 없는가 하는 부질없는 공상도 해본다.

법정 스님의 저서 가운데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무소유>다. 1976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무소유라는 제목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스테디셀러다. 이기적으로 치닫는 세상이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엔 그리움처럼, 무소유로 사는 데 대한 경이와 존경과 배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페인트가게집 아들도 차리고 나서면 귀공자 못지않은데 평생 힘든 일을 해온 아버지를 보고 배워서 막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면 가치 있는 일을 보고 배우게 하는 것 이상의 유산은 없는 것 같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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