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기획위원
만약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는 말이 맞다면, 우리네 학교는 왜 존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서와 토론뿐만 아니라 글쓰기를 거의 하지 않는 곳이 우리 학교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생들을 풍요롭게도, 정교하게도 형성하지 않는다면, 학교는 왜 존재할까? 대학이나 기업이 요구하는 ‘학생 줄세우기’를 위해서인가?
얼마 전 모든 학생들에게 신분 석차를 매기는 수능시험이 지났는데, 초등학교부터 12년 동안 정규교육을 받은 고3 학생들 중 대학이 요구하는 자기소개서를 스스로 쓰는 학생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우리 학교의 참담한 실상이다. 다른 글도 아닌 자기소개서를 말이다. 이 엽기적인 현실을 엽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육부 관료들이나 학교 관리자들, 교사들 또한 엽기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 공부하는 우리 학생들을 자기 언어조차 갖지 못한, 도무지 자기 생각이 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는 이 ‘경쟁의 아수라’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잘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에 따라, 우리는 사람과 사회에 관해 공부한다. 내가 속한 사회에서 주체적 자아로 살기 위해서다. 마치 “고래는 포유동물이다”라는 명제로부터 고래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면 고래와 포유동물에 관해 공부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우리가 국어를 비롯해 역사, 지리, 사회, 경제, 윤리, 철학 등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자명한데, 그런 공부의 일상에서 필수적인 게 글쓰기다. 왜냐하면 인문사회과학은 정답을 요구하는 정밀과학이 아니라, 사고력, 논리력, 인식능력과 감수성을 요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서 글쓰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곧 인문사회과학 공부가 사라졌다는 것에서 멀지 않다.
글쓰기는 각자가 자기 생각을 정리·형성하는 과정으로서 주체성과 다양성의 토대가 된다면, 주입식 암기는 학생 모두에게 같은 내용을 주입·숙지하도록 하는 과정으로서 기존 질서와 체제에 대한 자발적 복종과 획일성을 낳는다. 우리 사회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뜨는 소수의 사람들이 학교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배를 통해 그런 계기를 갖는 것도, 글쓰기가 사라진 것으로 알 수 있는, 학교에서 인문사회과학을 죽인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군국주의 일제 치하의 제도교육이 지배세력이 강제한 이념과 의식을 주입·암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민주공화국의 공교육에서는 글쓰기를 살렸어야 마땅했으나 일제 부역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위에 대학 서열화에 학문을 적응시키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실 글쓰기는 자기표현의 한 방식으로서 사회적 존재라면 누구나 내면에 가질 수 있는 본원적 욕구의 하나다. 그런데 대부분은 ‘나중에’ 쓴다고 말한다. 그 나중은 끝까지 나중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나중에 쓴다고 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쓸 일이다. 또 글을 최종적으로 나오게 하는 신체부위가 엉덩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우리 학생들이 글쓰기에 공포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주장·견해)을 써야 함에도 정답을 찾으려 애쓰기 때문이며(없는 정답을 찾으려 하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글쓰기 훈련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 그것은 주체적 자아 형성에서 빠질 수 없는 과정이다. 이른바 국격을 높이고 싶은가. 그 길은 먼 데 있지 않다. 모든 학교에서 암기 대신 글쓰기를 허하라. 국격을 넘어 문화사회로의 발돋움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리영희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사상의 은사로 불리는 선생은 나에겐 감히 덧붙인다면 루쉰, 사르트르와 함께 글쓰기의 스승이었다.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빈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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