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실장
사람들은 이익 중에서 선택할 때는 안전한 쪽을 선호하지만, 손실 중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쪽을 택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80만원을 얻을 선택’과 ‘100만원을 85%의 확률로 얻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확률이 15%인 선택’을 보자. 이 경우 뒤쪽(85만원)이 앞쪽(80만원)보다 이익(기대효용)이 크지만 절대다수가 앞쪽으로 쏠린다. 반면 ‘80만원의 손실’과 ‘85%의 확률로 100만원을 손해보지만 아무 손실도 보지 않을 확률이 15%인 선택’ 중에서는, 뒤쪽(-85만원)이 앞쪽(-80만원)보다 손실이 큰데도 압도적 다수가 뒤쪽으로 기운다. 이런 현상을 영역효과(frame effect)라고 한다. 누구든 ‘이익영역’에 있다고 여기면 보수적으로 움직이고, ‘손실영역’에 있다고 생각하면 모험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 등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통상적 도발의 지속’인지, 아니면 ‘과거와 차원이 다른 새 흐름의 시작’인지를 놓고 분석이 엇갈린다. 아직은 통상적 도발이라는 의견이 더 많지만, 앞으로 뒤쪽이 더 힘을 얻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상황이 북쪽으로선 손실영역에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이다. 계속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위험하더라도 모험을 해보는 쪽으로 끌리기가 쉽기 마련이다.
이런 구조를 만드는 데는 북한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도 크게 기여했다. 남북관계는 1990년대 이후 최악의 적대적 대립 상태이며, 동북아 전체로 갈등구조가 빠르게 확산되는 중이다. 중국의 코앞인 서해에 미국 항공모함이 진입하고 미국이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을 하자고 공공연하게 압박하는 것은 몇해 전만 해도 생각도 못하던 일이다. ‘유사시 자위대의 한반도 파견을 놓고 한국과 논의를 시작하면 좋겠다’고 한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발언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부는 한걸음 더 나간다. 이명박 대통령은 얼마 전 ‘남북관계가 정상화되는 과정’이라고 강변하더니 이제는 ‘통일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한다. 북한붕괴론을 공식화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면,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어떤 적극적인 노력도 하지 않겠다는 무대책을 합리화하는 발언이다. 과거 독자적 군사능력도, 현실적 대북정책도 없었던 이승만 정부가 북진통일만 외친 것과 다를 바 없다.
최근 정세를 보면 지난 20년과는 다른 큰 변화가 생길 조짐이 보인다. 우선 북한은 일관된 대미 협상 최우선 노선에서 대중 협력 우선으로, 대남 대화에서 군사 중시로 바뀌고 있다. 미국 또한 대중 협력에서 대결 우선으로 가고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미국이 북한 핵 문제의 초점을 비핵화에서 확산 방지 쪽으로 조금씩 옮겨가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런 흐름이 고착되면 우리나라는 정세 주도권을 잃으면서 최대 피해자가 될 것이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북쪽이 남쪽과의 관계에서 이익영역에 있음을 확실하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평화가 확보되고 핵 문제 등 주요 사안에서 해법의 실마리가 나온다. 급변사태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냉전 종식 직후인 김영삼 정권 때부터다. 그런데 막상 급변사태 계획을 짜놓고 보니 남북 교류·협력 계획과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남쪽이 북쪽 지역을 군사적으로 강점해 통치권을 행사하지 않는 한, 남쪽이 할 일은 사태를 진정시키면서 북쪽 상황에 맞춰 지원을 강화하는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곧 남북 교류·협력은 그 자체가 급변사태 대비책이기도 하다.
지금 정부의 대북정책은 ‘코끼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바늘로 찌른다’는 식이다. 핵심 현안에는 손을 놓은 채 막연히 북한 체제의 붕괴 가능성에 모든 것을 기대는 이런 태도는 그 자체로 북한 못잖은 모험주의다. 정부는 지금 위기가 일상화하는 길로 가고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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