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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자이언트’와 어산지

등록 2010-12-14 20:54수정 2010-12-15 13:20

김영희 국제뉴스팀장
김영희 국제뉴스팀장
최근 종영한 드라마 <자이언트>에서 이성모는 ‘어르신의 비자금 장부’ 하나를 폭로하기 위해 수십년간 사선을 넘나들다 머리에 박힌 총알 때문에 숨진다. 비장하다. 성모와 동생 강모는 선하고 도덕적으로도 깨끗한 영웅이다.

레이디 가가의 시디로 위장돼 빠져나온 미국 외교전문 폭로에 이런 드라마 같은 비장함은 없다.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는 ‘하필이면’ 성폭행 혐의로 체포돼 있다. 온갖 정치적 음모설이 제기되지만 가장 열정적으로 이번 미 외교전문 폭로 건을 보도하고 있는 영국 <가디언>이 전한 바에 따르면, 스웨덴에서 위키리크스와 협력하고 있는 시민단체도 “외부의 정치적 압력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혐의 자체에 대한 판단은 스웨덴 사법부에 맡기는 게 나을 것이다.

어산지는 흠결 없는 영웅이 아닐지 모른다. 1971년 베트남전의 추악한 면을 드러낸 펜타곤 페이퍼 폭로에 비견되지만, 대니얼 엘즈버그만큼 목적의식이 분명해 보이지도 않는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그가 반전주의도, 반부패주의도 아닌 그저 모든 비밀에 반대하는 ‘반비밀주의’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진보적인 학자 수전 더글러스 미시간대 교수는 더 중요한 이슈를 카다피의 우크라이나 미녀 간호사 같은 가십거리들이 덮어버렸다며 “위키리크스는 국제정치의 〈TMZ〉(타이거 우즈의 온갖 사생활을 시시콜콜히 파헤쳤던 가십매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문건 공개에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지적, 동의한다. 그렇기에 <가디언> 등 5개 매체들은 수개월 동안 수십명씩 전문가들이 달려들어 작업을 했다. 그럼에도 불충분한 점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산지가 말한 ‘과학적 저널리즘’ 덕분에 전세계 언론들은 직접 정보원이나 정보의 신빙성과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도 한국 주도 통일 바란다’는 문건을 국외 언론은 그대로 전했지만 우리는 외교안보 라인의 인식의 문제점 지적으로 나아갔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독일,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등 세계 곳곳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이다. 문제점만 들추는 논리는 구더기 무서우니 장 담그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아프간전이나 이라크전 폭로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의 공식 반응은 이렇다.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새로운 내용은 없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그에게 간첩법까지 적용해야 한다고 안달일까? 실명이 공개된 사람들의 신변이 위험해서? 하지만 올해 잇단 아프간전·이라크전 문서 폭로 이후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보도는 단 한 줄도 나온 적 없다. “그 사이에도 아프간의 민간인들은 오폭 등으로 수십명씩 죽어갔다.”(어산지) 이번 폭로 전 예상 피해를 구체적으로 알려달라는 위키리크스의 요청도 국무부는 묵살했다.

어산지는 ‘국가와 테러리스트 음모’란 글에서 권위주의 국가는 자신의 권위주의가 알려지는 걸 막지 않으면 작동할 수 없으며 이를 막기 위해 반드시 음모로 나아간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보이는 조급증은 적어도 이런 통제권을 상실한 데 대한 당혹감으로 보인다.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에 위키리크스 접근 금지령이 내리고 의회도서관 컴퓨터에서 위키리크스 사이트가 차단되고, 컬럼비아대가 학생들에게 ‘외교관이 되길 원한다면 위키리크스를 보지도 코멘트하지도 말라’는 이메일을 보낸 데 이르게 되면 1950년대 미국을 휩쓴 연방 충성프로그램이 떠오른다. ‘디지털 매카시즘’이란 말까지 나오는 이유다.

어산지는 영웅이 아니다. 그를 영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지난해 중국 베이징대 학생들 앞에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말했다. “더 많은 자유로운 정보가 흐를수록, 그 사회는 더 강해진다”고. 빙고!

김영희 국제뉴스팀장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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