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많은 사람들이 ‘나눔’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모두 베푸는 자리에 서서 나눔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나눔의 대상, 즉 베풂을 받는 처지에 서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베푸는 자가 사회적 발언권을 독점하기 때문이기도 한데(베풂을 받는 자는 유구무언이다), 위고가 나눔에 관해 발본적으로 사유한 것은 시혜, 온정의 대상은 이미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상태로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적 나눔이 요구되고 칭찬받는 사회보다는 그런 나눔 자체가 요구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진과 해일의 천재지변을 겪은 일본 민중에게 나눔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눔을 베푸는 자가 베풂을 받는 자의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 비루함과 굴종에 대해서도 헤아릴 줄 알고 공동 책임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사적 나눔보다는 공적 분배에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복지를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철학은 인간의 존엄성이어야 한다. 시혜적(선별적) 복지가 사적 나눔과 마찬가지로 대개 이미 훼손된 존엄성의 생존에 다가가는 것이라면, 보편적 복지는 사회구성원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 이전에 다가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증세를 통한 공적 분배 없이 복지를 하겠다는 것은 사적 나눔, 곧 시혜적 복지에 머물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똑같은 말인 ‘나눔’과 ‘분배’가 전혀 달리 받아들여진다. 사적 나눔엔 모두 관대하지만 공적 분배에는 쌍심지를 돋우며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가진 자들이 사적 나눔을 강조할 때 우리는 그 안에 공적 분배의 요구를 미리 막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음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가령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제기한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이건희 삼성 총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자본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아니면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를 도대체 모르겠다”고 응수했다. 그가 평소 품고 있는, 성장의 반대인 분배에 대한 적대적 의지가 중소기업의 기술을 가로채고 납품단가를 후려치는 재벌기업의 강자독점구조까지 자본주의 경제질서인 양 강변하는 데 이른 것이다. 이른바 ‘상생 협력’이 다만 말잔치에 불과한 그에게서 가진 자의 고품격이 요구되는 공적 분배에 대한 인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같다.
최근에 독일의 거부 페터 크레머는 미국의 워런 버핏이나 빌 게이츠의 기부문화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사회에서 얻은 이익을 공적 기구를 통하지 않고 사적 재산으로 선심 쓰듯 기부한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는 기부액의 대부분이 세금 공제되기 때문에 부자들은 기부를 할 것인지, 세금을 낼 것인지를 놓고 선택을 하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사적 나눔과 공적 분배를 명확히 구분했다. 그처럼 공적 분배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품격은커녕, 미국의 부시 정권이 상속세 폐지 법안을 내놓았을 때 앞장서서 반대했던 워런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은 부자의 품격조차 찾기 어려운 게 우리 사회 가진 자들의 실상이다.
이처럼 가진 자들의 모습 또한 각기 그들이 속한 사회의 반영물이다. 오늘과 같은 자본독재의 시대에 그들에게 그들 제품에 붙이곤 하는 고품격을 갖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요구하는 것과 같아서 그들에게 달려 있지 않고 우리의 비판적 역량과 실천에 달려 있다. 그것은 백혈병에 걸려 꽃다운 나이에 진 삼성전자의 노동자들, 스물다섯살 아들의 죽음에 비통해하면서 오늘도 삼성본사 앞에서 두달 넘게 1인시위를 벌이는 어머니와 연대하는 한사람 한사람의 몸짓과 목소리에 달려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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