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의 눈]
선진국은 사람의 가치가 높은 사회다. 그런데 우리는 늘 소득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4만달러가 되면 2만달러 때보다 모든 게 반쯤 가벼워지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면 소득은 숫자에 불과하다.
자의든 타의든 직장을 나와 보면 일이 있느냐와 없느냐로 ‘사람이냐 아니냐’가 갈린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런데도 한 가장에겐 목숨이나 다름없는 일자리를 줄이거나 불안정하게 하는 것을 우린 너무 ‘경영공학’적으로 얘기한다. ‘구조조정’이니 ‘유연화’니 하는 말로 감원을 합리화하고 스스로를 기만한다. 직원 자르는 게 무슨 아이디어라고 경영자를 칭찬하는 기사는 으레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따위의 상투어로 시작한다. ‘비즈니스 리엔지니어링’이니 하는 경영의 패러다임은 경제구조에 조응한 유행성 ‘담론’이지만, 사람은 하나하나가 우주다. 밀려난 개인에게 돌아오는 건 ‘낙오자’의 딱지일 뿐 재도전과 재기의 터전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사람보다 성과와 목표를 앞세우는 것은 우리의 몸에도 새겨져 있다. ‘잘살아 보세’ 시절의 ‘빨리빨리’ 의식은 ‘맹목의 질주’를 우리 사회의 기본값으로 설정했다. 횡단보도에 서서 운전자를 관찰해 보자. 하얀 선 안으로 차를 슬금슬금 밀어 올리고, 건너는 사람이 있어도 틈을 봐서 우회전하다 뛰어드는 어린이를 치는 일도 잦다. 불과 1분도 행인을 위해 배려하지 못한다. 먹고살기 힘들어서겠지만 오토바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인도를 요리조리 누비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는 수상한 힘에 끌리는 ‘좀비’처럼 서두를 뿐이다.
한창 축구 하고 여행도 해야 할 아이들을 ‘공부기계’로 만드는 것도 심각한 인권침해다. 부모야 안타깝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죄는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중산층 밀집지역의 부모들이 ‘국내외 명문대를 나와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여름에도 커프스버튼이 달린 긴소매 드레스셔츠를 입는 직장(투자은행 등)에 다니는 키 185㎝의 아들(또는 딸)’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되면 남 보기 좋고 본인도 나쁠 건 없을지 모르나, 유치원부터 시작된 전력질주에 아이의 감수성이 메말라가는지, 꿈이 사라지는지, 누군가를 ‘왕따’해 가해자로서의 ‘우리’를 확인하지 않으면 친구를 맺어가지도 못하는지 따위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면 그것이 부모의 혐의다. 현 정부 들어 인권이 어이없이 역주행한 것의 뿌리는 우리 사회의 이런 척박한 인권 토양에 닿아 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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