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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분노하라! / 홍세화

등록 2011-05-08 20:01수정 2018-05-11 16:13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5월6일치 <한겨레> 1면에 실린 서울지역 한 고등학교의 ‘성적 카스트’ 기사를 읽으면서 떠오른 게 “분노하라!”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출신 스테판 에셀이 최근에 펴내 인구에 회자된 책 제목이다. 이 작은 책자에서 그는 분노의 능력을 인간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의 하나로 꼽았는데, 우리가 분노를 잃으면 그 당연한 귀결로 앙가주망(참여)도 함께 잃는다고 경고한다. 젊은 시절에 분노 때문에 저항운동에 참여했다는 그가 93살에 이른 오늘 “분노하라!”고 선동적인 책을 펴낸 것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더욱 벌어지는 간극, 날로 추락하는 인권과 지구 전체의 상황 때문이다. 아직 인간이어서일까, 전교생을 “알짜(1~50등), 예비(51~100등), 잉여(101등 이하)”로 구분한다는 기사 앞에서 나는 분노에 떨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디플로) 한국판 5월호는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특집을 꾸렸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프리모 레비의 “이게 인간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할 지경에 이른 듯하다. 르디플로 특집에 실린 “등록금은 미치지 않았다. 뻔뻔할 뿐”이라는 글처럼, 우리가 흔히 미쳤다고 말하는 교육도 뻔뻔하다고 말해야 옳을지 모른다. 분노할 줄 모르는 토양에서 피어오르는 게 뻔뻔함이다. 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인간적 횡포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더욱 거세진 경쟁과 효율의 구호는 이미 “교육의 목표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있다”거나 “학교는 더불어 사는 법을 연습하는 곳”이라는 수사조차 지워버렸다. ‘선택과 집중’은 본디 인간인 학생이 적성과 능력에 따라 학과목을 선택하여 집중한다는 뜻인데, 이젠 학교가 학생을 선택하여 ‘알짜’만 집중하여 특별반을 편성하고 각종 특혜, 심지어는 교사 선택권까지 주고, 나머지는 ‘예비’하거나 ‘잉여’로 내버린다는 뜻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율학습실과 기숙사를 성적에 따라 자격을 주고, 좌석 배치는 물론 사물함, 책상 크기, 컴퓨터 설치 등 각종 학습 환경에서까지 차별하고, 성적 우수자에게만 토론대회 참가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다른 곳이 아닌 학교에서!

이런 학교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익힐까? 지독한 ‘지적 인종주의’를 학습하여 차별과 억압을 내면화하고 지적 인종주의에 의해 선택되지 않으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가령 ‘뻔뻔한’ 대학등록금 문제에 당사자인 대학생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이른바 상위권 대학에 진입한 학생들에게는 대물림 구조에 의해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점과 함께 지적 인종주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의식이 작용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중하위권 대학의 학생들은 지적 인종주의에 의해 버림받아 주체화에 이르기 어렵다는 게 작용한다. 선택된 자든 버림받은 자든 인간성 훼손의 피해자이긴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진보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듯이 인간성의 훼손도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조금씩 추락할 때 분노할 줄 몰라 익숙해지면 다시 또 추락하고 또 익숙해지면서 기어이 파국에 이르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에게 “이게 인간인가”라고 묻게 한 나치즘도 그런 경로를 밟았다. 특목고 우대와 자사고 확대, 고교선택제, 수능성적 공개, 학교 줄 세우기와 국민세금 차등 사용 등 경쟁만능주의 교육정책들이 하나하나 수용되고 익숙해지면서 마침내 학생들을 ‘알짜, 예비, 잉여’로 나누는 괴물학교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곧 저항이며, 저항하는 것, 그것이 곧 창조다”라는 말로 끝맺는다. 나는 먼저 서울시민들에게 모레(5월11일) 마감되는 학생인권조례 발기인 서명에 동참해달라고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우리 학교가 조금이라도 덜 흉물스럽게 하기 위해.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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